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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Jun 02. 2020

내가 아는 이 여름의 전부

<지지 않는다는 말>_김연수 

                              



'시'처럼 읽히는 산문이 있다. 김연수 작가가 쓰는 산문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지고, 가만히 눈을 감고 방금 읽은 문장을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가 경험한 일들이 언젠가 나도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아득함, 그가 사계절 내내 걸었다던 일산 호수 공원에 내 발자국을 보태기도 하면서,  나는 작가가 좋아하는 고독한 밤과 여름과 청춘과 달리기를 담은 글들을 읽으며 초여름을 맞이했다. 

   


막 청춘의 절정이 지나갔다._32p


오랜만에 꺼내 읽은 책에서 다시 '청춘'의 냄새를 맡았다. 한 여름 빳빳한 햇볕의 냄새.   


내게 청춘이란 7월 중순, 평일 오후의 테니스장 같은 이미지다. 뜨겁고 뜨겁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라 코트는 거의 비어 있다. 땅에서는 햇살의 열기가 고스란히 다시 올라온다.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라켓으로 공을 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한가롭게 들려온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조금 전까지 여름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절정을 지나 여름이 내게서 막 떠나가기 시작했다고 느낀다. 약간의 아쉬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붙잡고 싶은 욕망은 들지 않는 그런 순간, 내게 청춘이란 그런 것이었다.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_38p 


예민하고 약한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한다. 그리고 '행복한 날이 하루라면 외로운 날도 하루'라는 사실에 실망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에너지로 하루를 열심히 살뿐이다.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떤 시간도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행복한 날이 하루라면 외로운 날도 하루라는, 그런 식으로 이 우주는 공정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보리스 쿠스토디에프_볼가강에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는 이 여름의 전부_50p


'내가 아는 이 여름의 전부'라는 문장 안에 지금까지 내가 보내온 여름의 이미지들이 가득 차오른다. 여름에 관한 좋은 기억이 많아 어떤 날들을 꺼내 추억할지 마음이 바빠진다. '시'같은 산문이란 이런 것, 마음을 툭 건들어 머리로 생각하게 하고 가던 길을 멈춰 여기가 어디쯤인지 뒤돌아 보게 하는 그런 것.  


햇살은 점점 기울고, 시각은 오후 4시 50분. 골목길 맞은편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정원에는 놀랄 정도로 키가 큰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흔들린다. 벌레에서 시선을 돌려 그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런 동네에, 저처럼 크고 씩씩하고 튼튼한 나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고. 여기 받침대 위를 올라가려고 애쓰는 딱딱한 등껍질의 벌레에서 연신 참새들이 날아드는 그 플라타너스까지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는 이 여름의 전부다. 내가 아는 여름의 세계가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그 여름 안에서 더없이 한가하고 평온해진다.

그 뒤로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잠깐 앉아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 여기 테이블 앞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야' 그런 심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뛰지 않는 가슴들, 모두 유죄_296p


대학을 졸업한 지 13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눈만 감으면 졸업할 때쯤 느꼈던 막막함이라던지, 처음 월급을 받고 사 먹었던 커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이렇게나 생생한데. 13년 전처럼 책과 커피와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이 되었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했으나 아직은 여물지 않았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겠다고.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나는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대한 일을 하든, 변변찮은 일을 하든 시간은 흘러간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했었다. 이 삶에 과연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만약에 있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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