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언어들>_김이나
대학 졸업 후 나는,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감정이 메마른 상태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라디오를 들으며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이유의 <좋은 날>이란 노래가 들려왔다. 그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누가 이 가사를 쓴 거지?’.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가 귀에 박히면서 마음으로 쑥 내려가 지난 짝사랑을 끝내 소환하게 만들었던 이 노래. 나는 바로 ‘좋은 날 작사가’를 검색했고, 그동안 '가수는 누구인가'에 집중됐던 내 관심사가 '작사가와 작곡가는 누구인가'로 확장됐다. 그리고 '김이나'라는 사람이 <좋은 날>을 썼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김이나= 마음을 잘 쓰는 사람'이란 공식이 성립됐다.
실망
'우리는 서로를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주 가깝지 않은 누군가에게 ‘달’처럼 존재할 줄 아는 능력...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단면을 보여줄 줄 안다는 말이다.
나는 높은 확률로 당신을 실망시킬 테지만 우리 평균점을 찾아가 보지 않겠냐는 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20대 때는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떠난 적이 있었다. 대학 때 연합 동아리에서 처음 사귄 서울 친구, 대학은 달랐지만 같은 하숙집에 살았던 언니, 20대 중반에 함께 방황을 겪던 같은 과 언니….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내 안에 필터가 많았는지, 그들의 어떤 한 마디에 ‘이 사람의 가치관은 이렇구나. 나와는 안 맞는구나’란 생각으로 내가 조금씩 연락을 멀리했었다. 우리는 그때 '달'처럼 존재할 줄 아는 능력이 없었고, '평균점'을 찾아갈 생각도 없이 그저 이해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과하다
사과를 전장의 백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선언하고 나면 모든 게 종결되는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평화인 경우는 없다. 특히 피해를 입은 국가라면 그때부터가 오히려 아픔의 시작이다. 전쟁통에는 생존만의 문제였다면, 전쟁이 휩쓸고 앗아간 모든 것들을 복구해 나가며 겪는 고통이 삶의 일상이 되는 것은 가장 슬픈 풍경이다.
사과를 하는 쪽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주도권을 갖는 착각을 한다. 상대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은 마치 끓는 냄비가 올라간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는 것과도 같다. 더 끓일 의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식지는 못한다.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내 마음은 '용서'를 하고 '사과'를 했던 후의 감정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넘실거렸다. 나는 이렇게 사과를 받고도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슬퍼했던 내 마음을 강한 이미지로 표현한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내가 꼭 그랬다. 사과를 받는다고 그 감정이 바로 식지는 못하고,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순간 주도권을 가졌다는 착각을 했었다. 나는 양쪽의 입장을 모두 겪어서인지 위의 내용이 모두 공감이 됐다. 균열된 관계가 어찌 사과 한마디로 예전처럼 같아질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고통의 시작은 전쟁 이후의 시간들인 것을.
살아남다
빛나는 재능만으로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군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 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 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김이나 작가가 슬럼프를 겪고 다시 재기하면서 썼던 곡이 이선희 <그중에 그대를 만나>라고 한다. 어쩐지 그 곡을 들을 때마다 희망이 느껴진 게 우연은 아니겠지 싶다. 내가 이 곡을 듣고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결말이 희망에 닿았으면 하는 나만의 기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 은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야 할 통과의례다. 작가도 그런 시기를 겪었기에 저렇게 깊고도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가사가 나왔겠지.
'어렴풋이 품고 있는 생각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말해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을 작가가 직접 쓴 경우엔 '그도 숱한 날들을 독자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김이나 작가는 언어에 담긴 생각을 정교하게 풀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역시 그래서 작사를 잘하는 거였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언어들을 이렇게까지 정밀하고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래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증거다. 또한 작가가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언어가 본인의 삶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보통의 언어들이 오래도록 김이나 작가의 마음을 떠다니다 다시 그녀의 손끝에서 정교하게 피어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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