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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Jul 19. 2020

내 꿈의 절반


아가, 고생했다.


졸업 논문 심사가 있던 날 새벽,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쪽진 머리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는 한참을 쓸어내리셨다. 나는 그 온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손을 허공에 뻗어 할머니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가, 고생했다.'라고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마치 2007년의 봄을 모조리 논문에 바친 나의 노고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모든 걸 알고 있는 끄덕임이었다.  


할머니와는 생전에 각별한 정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명절에 '할머니 저희 왔어요.' 하면, 할머니는 문을 열고 '왔냐, 고생했다. 들어가 쉬어라.' 하며 담백한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자식을 세 명이나 떠나보냈던 할머니는 평소 조용하면서도 행동이 민첩하셨다. 집에서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고 내 엄마에게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었다. 손주들에게는 박하사탕을 건네는 것으로 애정을 대신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혹시 할머니가 마음으로는 나를 아끼셨던 걸까. 이 졸업 논문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고, 이걸 통과하지 못한다면 한동안은 일어설 수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자세히 말하자면 당시 나의 상황은 '적도 무풍지대'와 같았다. 겉으론 바람 한점 없이 조용해 보이나 내 안에선 뇌우와 스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연극 평론을 전공했지만 꿈은 라디오 작가였다. 수업 과제를 낼 때는 분석과 평론이란 장갑을 낀 손이 키보드 위에서 열심히 활자를 찍어냈고, 저녁 10시 넘어서의 블로그에서는 달달한 향기를 품은 손이 카스텔라 같은 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도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하필 3학년 때부터 시작된 전공 수업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평론을 공부한다면, 어느 정도 내 손에 맞는 글을 쓰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향의 도서관에서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을 보며 미래를 고백했던 그날의 토요일이 생각났다. 만약 용기를 낸다면 지금까지 공부했던 거와는 전혀 다른 분야고, 아는 사람도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다 그 날 새벽에 꿈에서 할머니를 만났고, 아침에 눈을 뜨자 나는 어쩐지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샐리 스와틀랜드_바다를 바라보며




그 날 아침, 논문을 들고 강의실 문을 노크할 때 나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칭찬이 많았던 논문 심사가 끝이 났고, 4년 반의 대학 생활이 잘 마무리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 몰래 할머니가 뒤에서 밀어주던 내 꿈은 후회가 무엇이 됐든 간에 이미 좋은 선택이 됐다. 나는 해볼만큼 해보고 힘들면 그때 '꼭 포기하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꼭 포기하자'가 전제 조건이었다. 꿈도 놓아줄 줄도 알아야 다른 꿈이 들어올 자리가 생길 테니.


'나는요 할머니, 할머니가 그 날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용기 내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내 꿈에 나타나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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