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의 곰 Mar 11. 2022

익숙한 그 집 앞

유희열을 참 좋아했지 




엘리베이터를 타면 학생들이 유튜브로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영상을 보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마스크에 가려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든 좋아하는 연예인의 소식을 알 수 있고, 심지어 그 연예인이 라이브 방송까지 해주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이었던 내 중고등 시절에는 오직 TV, 라디오, 잡지로만 연예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 학창 시절을 보낸다면 매일매일이 황홀해서 공부는 뒷전이었을 것 같다. (콘서트도 유튜브로 해준다니, 부모님께는 공부할 거라 말하고 문 잠그고 헤드폰 끼고 음소거로 소리 지르면 프라이빗 콘서트가 따로 없다.)


어제도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여학생이 예능 프로그램인 <놀면 뭐하니?>의 짧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유희열이 대표로 있는 '안테나' 신사옥을 구경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갑자기 '아 맞다, 학창 시절에 내가 유희열을 엄청 좋아했었지.'라는 생각에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중3 아니면 고1 때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한 달 동안 모은 용돈을 지갑에 가지런히 넣고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라디오를 통해 토이의 유희열이 <익숙한 그 집 앞>이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문제집에 낙서를 하고 있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 잠이 번쩍 깼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서랍을 열어 용돈 상자를 열어보고 '이 정도면 책을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확신에 갑자기 없던 희망이 샘솟았다. 그 당시의 난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듣고 너무 좋은 나머지 이 곡의 작곡가가 유희열이고, 그 사람이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았던 때였다. 그날 나는 좀 흥분해서 문제집 몇 장을 더 풀었던 것 같다.






 


나는 <익숙한 그 집 앞>을 사기 위해 퇴근해서 피곤한 아빠를 겨우 졸라 차를 얻어 타고 가을 서점으로 출발했다. 서점 주인은 그 책을 몰랐지만 나와 함께 책을 찾아줬다. 한참을 손끝으로 책 제목을 보던 나는 '여기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활짝 웃으셨다. 그러고 보니 '어떤 책을 살 거니, 무슨 내용이니, 작가는 누구니' 이런 건 일절 물어보지 않고 그냥 서점에 데려다주셨던 아빠는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든 작곡가인데 책을 썼대. 작곡 엄청 잘해" 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아빠에게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와 작곡한 노래 제목을 알려주며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오며 가며 30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원하는 책을 품에 안았다는 기쁨과, 용돈을 모아 책을 사는 딸을 칭찬해주던 아빠의 따뜻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을 서점, 아빠, 내 용돈, 토이 테이프, 익숙한 그 집 앞... 짧은 시간 내 눈은 그 여학생의 휴대폰에 뜬 <놀면 뭐하니?>에 닿아 있지만 내 머릿속은 그 시절의 영상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나는 집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지도 않고 핸드폰으로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틀었다.


그래, 나는 유희열을 참 좋아했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첫 입학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