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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Mar 14. 2022

사랑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

애지욕기생 



올해 첫날,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축사 부탁을 받았다. 결혼 생각이 없다던 친구였기에 결혼 소식은 뜻밖이었다. 친구는 청첩장에 같이 실릴 짧은 축사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친구가 내 결혼식 때 청첩장과 함께 보낼 일러스트를 그려준 적이 있어서 당연히 써주겠다고 했다. 일단 가볍게 승낙은 했지만 막상 쓰려니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식장에서 읽을 축사라면 친구와의 일화를 보태 쓰면 되지만 지면에 실릴 내용이고 또 10줄 이내로 쓰려니 막막했다. 


그러다 내가 청첩장을 준비할 때 썼던 문구가 기억났다.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나는 상대방이 나로 인해 세상이 살만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 구절을 청첩장에 인용했다. 올해로 결혼 9년 차, 지난 결혼 생활을 돌아보니 그 구절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었는지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나의 결혼 생활은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은 시간들이 얇고 겹겹이 쌓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일, 힘든 일, 어려운 일 다 겪으며 이제는 휴전기에 접어든 상태다. 마흔을 앞두고 결혼 준비로 들떠 있는 친구는 나의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다. 그저 묵묵히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사이기에 이런 자잘한 불행은 나누지 않는다. 이 정도의 마음고생은 혼자 삼킬 수 있고, 누군가에게 말해도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게 된 나이가 된 것이다. 축사를 써 내려가다 결혼 생활의 조언과 당부의 말에서 손이 멈췄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휴전기에 접어든 결혼 생활에 대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알마 타데마_나에게 더 묻지 말아요

                                     



친오빠의 오랜 친구였던 남편을 처음으로 만난 날, 친오빠한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고 키도 훤칠해서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그날 남편도 내가 자기 이상형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며 고시 준비 중이었던 자신의 삶이 크게 흔들린 날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 버스를 타고 오면서 서로 연애는 건너뛰고 결혼을 상상했었다. 비록 남편의 고시 준비로 연애는 길어졌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태어나 처음으로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원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내 마음의 절반은 충만하다. 이 충만함으로 지난 9년을 버티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를 떠올리니 다음 문장이 자연스럽게 써졌다. 


「부디 사랑을 처음 느꼈던 그날을 잊지 마세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그때의 마음으로 

앞으로의 날들을 함께 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평범한 축사지만 나의 진심이 담긴 조언이 친구의 마음에 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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