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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Mar 16. 2022

3월 이맘때쯤

가슴이 왈랑 왈랑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제법 따뜻한 바람이 찬 바람과 섞여 얼굴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마스크를 위로 들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봄의 기운을 머금은 흙과 풀 내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눈을 돌려보니 단단하게 뭉친 꽃봉오리와 새잎이 살짝 올라온 나뭇가지가 봄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딸의 생일이다. 8년 전 나는 딱 이맘때쯤 봄의 문턱에서 이런 냄새를 맡았다. 태교 일기를 쓰기 위해 매일 커피숍으로 내려가는 길, 땅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흙 내음에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쓴 태교 일기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봄바람에 가슴이 왈랑 왈랑 거린다.

커피숍으로 가는 길,

내 발걸음은 어느새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

프랑크푸르트의 마인강

퓌센 유스호스텔의 아침 놀이터

티티새 호숫가의 검은 숲

봄만 되면 습관적으로 독일 독일, 전혜린의 슈바빙.

잠시 임신 중이라는 것을 잊고 봄바람에 독일로 떠났네.」


출산을 얼마 안 남겨놓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몹시 설레었나 보다. 결혼 전, 봄에 독일로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 기억과 맞물려 임신 중이라는 것도 잊고 마냥 즐거워했구나 싶다. 특히나 커피숍으로 가는 길 옆에는 나무들이 많아 봄 냄새가 진동을 했었다. 그게 임산부의 마음을 왈랑 왈랑 거리게 했었나 보다. 출산 후 어떤 힘듦이 다가올지 모른 채 그저 행복해했던 그때의 내가 눈에 아른거린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은 봄이 오는지 마는지 안중에도 없었던 때에 비하면 내 후각 세포가 얼마나 예민하게 열려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기였다.



클로드 모네_봄철  




매일 태교 일기를 쓰기 위해 커피숍으로 내려가던 그 길이 이제는 아이의 등굣길이 되었다. 지난주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살짝 배를 쓰다듬어봤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뱃속의 아이를 기다렸던 내가 이제는 희망과 두려움을 양손에 쥐고서 그 길을 걷는다. 희망을 쥔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두려움은 곁에 두고 나란히 걷는다. 그날 저녁 나는 짧은 일기를 썼다.


「아이를 낳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어린 내가 봄바람에 웃으며 커피숍으로 향했다. 모르는 게 나았을까, 혹은 미리 알았더라면 덜 아팠을까. 가끔은 그때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 같다.」


일상에 치여 사는 게 무덤덤해질 땐 그때의 봄 내음을 떠올린다.

아무도 훔쳐 갈 수 없었던 행복이 3월 이맘때쯤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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