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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곰 Mar 18. 2022

봄날의 달리기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 일기장을 보게 됐다. 겨우 2년이 지난 일기장이지만 왠지 오랜 시간이 지난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여기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시점을 생각하면 점프를 해서 금방 돌아갈 수 있지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떠올려보니 결코 금방 지나온 시간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년이 지난 일기장에서 오래되고 묵직한 기분을 느꼈나 보다. 나는 일기장을 한 페이지씩 넘겨보다 5월의 일기에서 '달리기'라는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이번 주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걷기와 자전거로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체력에 고민하다 달리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나는 그즈음 달리기를 시작하기 위해 조금씩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달리기가 몹시 하고 싶어질 때까지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하는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아이를 등원시키고 헬스장에서 그룹 PT를 받으며 체력을 기르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센터가 문을 닫아버렸다. 집에서 홈트를 하자니 어색하고 해서 걷기와 자전거로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달리기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해서, 꾸준히 하고 싶다고 그게 마음처럼 될까 싶었다. 무엇인가를 결심하고 나서 꼭 한 번은 자기 검열의 시간이 찾아오는지라 그때도 그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무릎이 아파지겠지, 발목이 시큰거리겠지, 1분을 못 채울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미리 의심하며 갑자기 찾아올 '그 시간'에 대한 절망을 배분하는 것, 이것은 실패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내 오랜 습관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 시간'이 더디게 왔다. 꼬박꼬박 이틀에 한 번씩 뛰었고, 무릎과 발목도 신경이 쓰일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1분을 겨우 뛸 수 있었던 내 몸은 5분은 거뜬하게 뛸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은 저기 벤치까지 뛰어볼까' 하면 내 다리는 거기까지 뛰었고, '그럼 내친김에 저기 큰 바위까지 뛰어보자' 하면 또 힘들어도 큰 바위만 바라보며 뛰었다. 핸드폰도 물병도 없이 맨몸으로 30분을 걷다 뛰다 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이 내 눈 안에 가득 차올랐다.




칼 라손_나의 큰 딸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앞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풍경과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루키의 문장처럼 정말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었다. 2020년 봄날에 시작해 두 달 정도 이어졌던 달리기는 결국 무릎 통증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처음으로 해본 달리기는 아이와 술래잡기를 할 때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심폐지구력을 선물해 줬다. 요즘도 아이를 잡으러 갈 때마다 '그때 달리기를 해둬서 다행이야'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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