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경을 잊고 있었네
어제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나섰다. 코로나 후유증인지 종일 피곤하고 잠이 쏟아져 화창한 날씨를 즐기지도 못하고 낮잠을 2시간이나 잤기 때문이다. 딸은 만화를 다 보고 심심해졌는지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내 옆으로 왔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뜬 나는 '너도 한숨 잘래?'라고 말하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딸은 내 옆구리로 파고들어 한참을 버둥거리더니 그새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5시, 산책을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저녁을 일찍 먹기로 하고 밥을 안쳤다.
퇴근한 남편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나야 집에서 낮잠을 자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남편은 점심시간에 쪽잠을 자는 것으로 후유증을 이겨내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당근주스와 영양제를 챙겨주며 30분만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대신 다녀와서 딸의 저녁 루틴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덧붙였다. 남편은 힘없이 '알겠어'라고 말하며 거실에 드러누웠다. 미안하긴 했지만 딱 30분이란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저녁 산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직 후각이 돌아오지 않아 저녁 냄새를 맡지 못했지만 그동안 맡아온 냄새들을 상상해봤다. 만개한 꽃들의 달큼한 냄새, 어둠을 먹은 나뭇잎의 진한 냄새, 차분함이 가라앉은 거리의 냄새... 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저녁 냄새들을 떠올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어떤 노래를 들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2000년대 인디음악 채널에서 손이 멈췄다. 반가운 마음에 재생을 누르고 산책을 시작했다.
첫 곡은 롤러코스터의 보컬 조원선이 피처링한 김현철의 <봄이 와>였다. 02년도에 발매된 이 곡은 봄이 시작될 때쯤 라디오 첫 곡으로 자주 흘러나오곤 했다. 대학 시절 네 번의 봄을 거치면서 이 노래가 들려야 '아 봄이 왔구나' 실감했던 기억이 났다. 옛 추억에 빠져 신나게 노래를 듣는 동안 남편과 약속한 30분이 되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노래가 바뀌면서 박혜경의 <주문을 걸어>가 흘러나왔다.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전주부터 흥겨운 이 노래는 고등학교 내내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특히 '너는 마법에 빠진 거야'의 가사가 꼭 코로나에 걸린 지금 내 상황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다 잠시 2000년대 초반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나이를 먹으면 지난 추억을 곱씹으며 산다는데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가끔 현재를 잊고 싶을 땐 반사적으로 행복했던 날이 저절로 떠오른다. 스무살 시절 MP3에 들어있던 노래들이 마흔을 앞둔 내 마음에 다시 닿았던 날의 저녁 산책, 이날의 기억은 다시 '행복했던 날'이란 폴더에 저장되었다. 이렇게라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