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린 Mar 13. 2022

셋에서 혼자 남은 첫 외국 생활

내성적이어도 할 말은 한다.


나는 한국에서 엄청 조용한 학생이었다. 물론 친구들과 만나 떠들면 엄청 활발해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 흔한 사춘기도 없었고, 그냥 다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옛날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받던 생활통지표에서 담임선생님들의 코멘트는 항상 '내성적'이다. 라는 거가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 브라끈을 당기고 도망가는 남자애들, 떠드는 남자애들, 고무줄 놀이 방해하는 남자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큰 키를 이용해 그렇게 때렸나보다. 그렇게 조용했던 내가 새로운 환경에 새로 만나는 사람들, 심지어 외국인들과 어울리는데 생각보다 잘 지내고 원래보다 더 활발해지고 아마 말도 많아져서 엄마는 내심 놀랐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고3이었던 나이가 되자 나도 부모님도 자연스레 대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피지는 아무래도 위치상 뉴질랜드와 호주가 가까이 있어, 당시 같이 유학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호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실제로 그 이유로 호주로 일주일 정도 여행 아닌 여행을 하며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보기도 했다. 엄마 아빠는 한국에 계시면서 그 당시 한창 핫했던 유학박람회를 다녀오셨는데, 그때 호텔 경영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셨나보다. 그래서 호텔쪽을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하셨다. 


처음에 엄마와 동생과 함께 피지로 갔는데, 1년간의 기러기생활이 아빠는 너무 힘드셨던지 또 우리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유학박람회를 다니시더니, 동생이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알아보셨다. 그렇게 동생은 1년의 피지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의 학교로 가게 되었고 나는 고3의 나이에 캐나다로 가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었다. 새로운 환경, 어나더 레벨일 영어수준, 그곳에 가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는 대학진학 등등. 그래서 난 과감히 피지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새로운 곳에 막판에 가서 고생할 이유가 굳이 없고 고3의 나이에 가면 학년을 꿇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나때문에 피지에 있을 이유가 없어져 한국으로 귀국해 아빠와 살게 되었고, 나는 우리가 처음 피지에 왔을 때 잠시 신세졌던 한국인 민박집에 홈스테이로 지낼 수 있게 됐다. 고3이 되어서 처음으로 엄마아빠가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보통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면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 유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들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난 그런 것 하나 없이 어떤 새로운 환경에 놓이더라도 쉽게 친해졌다. 처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렇게 한두명씩 말을 걸다보면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성격이라 여러명과 한꺼번에 친해지는 흔히 말하는 ‘인싸’의 타입은 아니지만, 결국엔 왁자지껄 시끄러워지는 말괄량이도 될 수 있는 성격이었다. 피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동생들은 내가 동생이 있다보니 누나, 언니로서 챙겨주곤 했다. 엄마는 서서히 활발해지는 내 성격을 보고 호텔쪽을 공부하면 더 좋은 쪽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다. 


또 생각보다 어른들에게 싸가지없이 행동할 때가 많았다. 우리 부모님은 예절측면에선 굉장히 엄하신 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와 동생은 항상 존댓말을 썼고 아빠가 수저를 들기 전엔 우린 들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 아빠도 엄청 꼰대같이 들리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고, 기본적으로 어른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도 한다. 다만 그 당시 흔히 꼰대라고 하는 어른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먼저 첫 민박집이자 홈스테이 할 때 집주인 아저씨는 해병대셨고 술을 엄청 좋아하셨다. 그 작은 피지라는 동네에 해병대 아저씨들은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피지같은 곳에서 할 일이 그닥 많지 않은 아저씨들이 하는 일이라곤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스트 패밀리 아저씨도 알콜 중독 수준이었다. 술을 마시면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는데다 더 문제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쌍욕을 하곤 했고 그 광경을 홈스테이하는 아이들과 내가 항상 지켜봐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무서운 게 없었는지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아저씨에게 그만 좀 하시라고 몇번씩이나 대들었다. 냉장고에 넣어둔 소주병의 소주를 다 따라버리고 물로 채워 넣어 한바탕 난리난 적도 있다. 


또 한번은 나와 동갑인 딸과 아들이 있는 아저씨도 가족이 다 함께 피지로 아예 이민을 왔는데 딸은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를 하곤 했다. 여자들은 유학같은 건 필요도 없다며 그냥 남자 잘 만나 시집이나 가면 된다고 나한테까지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나와 동갑인 그 여자애가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난 거기에다 시집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 난 내 삶을 살테니 아저씨 딸이나 시집 잘 보내시라고 했다. 그리고 아저씨 딸이 아빠가 그래서 참 불쌍하다고 까지 했다. 남들은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난 달리 하지 않을 것이며 잘 했다고 생각한다. 피지에서는 참 존경할만한 어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이 참 아쉽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발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