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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린 Mar 15. 2022

안녕, 피지.

대학교 준비부터 예상하지 못한 빠른 귀국까지

한국의 고3이었던 나이가 되자 나도 부모님도 자연스레 대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피지는 아무래도 위치상 뉴질랜드와 호주가 가까이 있어, 당시 같이 유학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호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실제로 그 이유로 호주로 일주일 정도 여행 아닌 여행을 하며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보기도 했다. 엄마 아빠는 한국에 계시면서 그 당시 한창 핫했던 유학박람회를 다녀오셨는데, 그때 호텔 경영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셨나보다. 그래서 호텔쪽을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유하셨다. 




처음에 엄마와 동생과 함께 피지로 갔는데, 1년간의 기러기생활이 아빠는 너무 힘드셨던지 또 우리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유학박람회를 다니시더니, 동생이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알아보셨다. 그렇게 동생은 1년의 피지생활을 마치고 캐나다의 학교로 가게 되었고 나는 고3의 나이에 캐나다로 가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었다. 새로운 환경, 어나더 레벨일 영어수준, 그곳에 가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는 대학진학 등등. 그래서 난 과감히 피지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새로운 곳에 막판에 가서 고생할 이유가 굳이 없고 고3의 나이에 가면 학년을 꿇을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나때문에 피지에 있을 이유가 없어져 한국으로 귀국해 아빠와 살게 되었고, 나는 우리가 처음 피지에 왔을 때 잠시 신세졌던 한국인 민박집에 홈스테이로 지낼 수 있게 됐다. 고3이 되어서 처음으로 엄마아빠가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교성적 외에도 영어성적 IELTS 점수가 필요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로 간 내 고등학교 성적은 나쁜 편도 아니었지만 당연히 좋지도 않은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곳의 고등학교는, 당시 한국에서 13과목을 배우던 나에게는 거의 해방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5과목. 영어, 수학은 모든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배워야하는 과목이었고 나의 경우, IT, 경제, 회계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IT과목은 컴퓨터라 그냥 선택했는데 경제나 회계는 왜 선택했는지 나로서도 참 의문이다. 영어는 꾸준히 1:1과외를 하면서 점차 좋아졌고, 수학 수준은 고1 수학 정석까지 공부하고 간 나에겐 마지막 고3까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IT는 플로우차트와 같이 프로그래밍의의 기초를 배우는 거라 생각보다 헤맸고, 회계는 말할 것도 없으며 경제도 그랬다. 경제는 의론적인 것이라 그래도 외우면 뭐라도 쓸 수 있었지만 회계는 그렇지가 못해서 마지막에 과외를 받아야 했다. 피지의 교육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려웠던 이유는 시험의 모두가 주관식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는 에세이를 쓰고, 수학도 풀이과정을 모두 남겨야 했다. 나머지 IT, 경제, 회계 모두가 5개 보기 중 찍을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어떤식으로든 의견이나 이유를 제시해야 했는데 한국에서 그런 시험을 쳐본 적이 없는 나에겐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때를 발판으로 대학교에선 저항하지 않고 어느정도 수긍하면서 교육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6개월 정도는 IELTS성적을 받기 위해 IELTS학원도 다녔다. 총 6.0 이상을 받아야 했는데 영어를 좋아하던 나에게 크게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IELTS를 배우면서 좋았던 점은, 학교 다니면서 과외를 받으면서 보내지 못했던 고급 영어 단어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단어를 다시 쓸 일이 없어 많이 있기도 했지만 만약 영어원서를 많이 읽어버릇 했다면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 좀더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국령이라 영국 여왕의 엄청 젊었을 시절의 모습이 지폐에 있다. 


한국에 돌아오는 것은 원래 더 후의 일이기도 했으나 예정보다 더 빨리 돌아오게 됐다. 당시 홈스테이 가족들과 다 같이 거실에 모여 미드를 보고 있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당시엔 스마트폰이 없으니 국제전화란건 비싸고,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때 엄마는 갑자기 반응하지말고 대답하라면서 ‘혹시 한국에 오고 싶으면 올래?’라는 말 한마디에, 그 땐 참 어린 마음에 울음이 빵 터져버렸다. 갑자기 울어버리니 주변에 앉아있던 친구들이나 홈스테이 호스트 아주머니, 아저씨도 놀라고 엄마도 놀랐던 것 같다. 그 일 후로 나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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