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없이 잔디밭에서 뛰놀던 시간
피지에 도착한 것이 1월 16일이다. 그 동네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차를 운전하지 않으면 시내에 나가기도 힘들었다. 운전은 둘째치고 한국 공교육만 받다가 온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임시 숙소로 있던 한인민박에도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집을 구했을 때도 인터넷이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컴퓨터는 가지고 갔는데 그 컴퓨터로 도대체 뭘 했었는지.
학교에 다니기 위해선 비자를 따야 했다. 그곳 이민 회사의 말에 따라 우리는 관광비자로 입국해서 우리는 학생비자로 전환, 엄마는 미성년자였던 나와 동생의 보호자 자격으로 가디언 비자를 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날짜가 지나고 또 지나도 비자에 대한 제대로 된 진행사항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내가 듣기로, 학생비자를 따기 위해선 국제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는데 우리 형편에 국제학교의 학비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와 동생 두 명인데다, 여기서 국제학교를 다니는 게 가치가 있는지, 또 몇 년 다니다 대학도 가야 하는데 해외 대학을 갈 경우 학비 감당 등등, 그 당시 나와 동생은 이런 사정에 대해 생각할 나이는 아니어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서 글로 옮기니 엄마가 참 용감무쌍했다 싶다.
비자 전환이 빨리 안돼서 학교를 못 가니 처음엔 학교 안 가서 좋다고 했던 나도 울고불고했더랬다. 심지어 내가 갔을 때 난 한국 학년으로 고2였고 동생은 중3이었다. 나이가 고3이 가까운 경우,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능 같은 걸 쳤을 때 언어문제 때문에 성적이 안 좋게 나올 수도 있고 영어를 고등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배우기 힘들어 한 학년 정도 꿇는 경우가 있는데 이민 회사에서 나보고 심지어 2년을 꿇는 것을 권장했다. 그 말은 동생과 같은 학년이 되는 것이었는데 죽어도 그건 싫다고 그냥 고2로 들어가서 해내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이제 생각해보니 피지라서 가능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린 국제학교는 애초부터 포기하고 일반학교에 갔는데 전교생 1000명 중 한국인이 10명 정도였다. 일단 한국인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10명 있는 한국인들은 반에 한 명씩 배정이 되었고 나름 모여서 밥도 먹고, 그중엔 우리가 머물었던 임시숙소의 아들, 그곳에 머물렀던 남매, 등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모여서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학교 캔틴에서 산 밥과 고기가 있는 점심을 사서 피지애들과 같이 손으로 먹기도 했다. 체육시간엔 다들 학교 유니폼인 샌들을 벗고 잔디밭에서 맨발로 달리기를 하기도 했다. 학교는 바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그 바다가 흔히 생각하는 휴양지의 바다같은 느낌은 아니라 바다에 가서 놀지는 않았더랬지만 그래도 바다가 보이는 잔디밭에서 냅다 뛰는 기분이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 학교 앞에 떡볶이를 팔듯이 피지에선 망고스틴 말린 것이나 망고 등등 과일들을 팔기도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 항상 들려 주전부리를 사서 다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피지의 인구는 반은 섬의 원주민인 피지안과 반은 영국군이 식민지 때 데려온 인도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 나름 잘 어울려 살아간다. 이렇게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곳들은 갈등을 아예 피하긴 당연히 어렵다. 한민족이라는 한국에서도 경상도 전라도 타령하며 지역감정이 없어지질 않는데, 하물며 내 나라도 아닌 곳에 끌려와서 사는 인도인들과 원주민인 피지안들은 어떻겠는가. 다만 우리는 미성년이란 특권으로 그런 거 없이 다들 어울려 잘 지냈던 것 같다. 특히 우리 반엔 특이하게 호주 사람이 있었다. 전교생을 봐도 한국인보다 백인이 적었는데 그 백인 친구가 우리 반에도 있었다. 우리 반에 나와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그 호주인, 피지 원주민, 피지 인도인이었다.
피지에선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와 같은 곳에서 유학하는 것과 같은 영어 실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다들 각각의 모국어가 있고 영어는 그저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피지안은 피지말을 쓰고 인도인은 힌디를 쓴다. 그래도 다들 피부색이 어둡고 머리가 아프로 헤어같은 느낌이라, 애쓰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피부색이 밝고 머리가 찰랑찰랑했던 나는 아무런 노력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어렵게 다가가서 말걸지 않아도 착한 친구들은 항상 나에게 다가와 영어도 못 알아듣는 나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때 그렇게 지냈던 게 지금까지 아마도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내가 되는데 발판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