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샘 저도 탁구부 할래요. 와 저는 안 되는데요?. “
“ 니는 너무 작다. 그카고 니는 공부도 잘하는데 말라꼬 탁구부 할라꼬? 마 고생스럽다. 그거 할 생각 말고 니 잘하는 공부나 열심히 하그라. “
“ 샘 지는 공부도 하고, 탁구라고 카는 것도 해 보고 싶으예. 샘 시켜주이소. “
“ 아따~ 가시나 조막띠만 한 게 고집은 억시로 시네. 오야오야 알았다. 그케라. “
“ 진짜지예? 감사합니다. “
애경이는 심장이 터질 듯 기뻤다. 그 어마한 강당 안을 들어갈 수 있다니, 내 동네와 내 교실 밖 새로운 우주를 만날 수 있다니,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일찌감치 강당 앞으로 뛰어갔다. 강당의 거대한 문이 애경이를 반기는 듯 살짝 열려있었다. 일 학년 때 귀신의 집 같아 애경이를 떨게 만들었던 강당이 이제 어엿한 삼 학년이 되고 보니 티비에서 본 어느 근사한 성당처럼 웅장해 보였다.
신입 탁구부를 기다리는 강당은 빼꼼히 문을 열고 어린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일반학생들에게 문을 열리지 않았던 곳에 당당히 입장할 수 있는 강당패스권이 생겼지만 애경이는 감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열린 문 사이로 강당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높은 천장과 넓은 단상, 그리고 단상 위 붉은 커튼, 바닥은 교실과 똑같은 나무 바닥이었지만 널찍하니 탁구대 여러 대가 나란히 두줄로 정렬되어 있었다. 겉모습만큼이나 낡은 강당 안은 전등이 꺼져 있어 살짝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어울리는 게 애경이 그동안 상상해 왔던 강당으로는 충분했다.
“ 우와~ 쥑이네… “
“ 뭐가? “
“ 엄마야. “
애경의 감탄스러운 혼잣말에 누군가가 답을 한 것이다. 놀란 애경이는 뒤를 돌아봤다. 빵빵하게 나온 배가 애경의 눈과 마주쳤다. 그 위로 올려다보니 묘하게 못생긴 아저씨가 푸른색 운동복을 입고 애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재는 누군데요? “
“ 니는 누군데? “
“ 저는 박애경인데요. “
“ 요것 봐라. 쪼맨한게 야무지게도 생겼네. 니 체육관에는 와 어슬렁 거리노? “
“ 여가 체육관인교? 강당 아니라예? “
“ 뭐라카노 딱 보면 모르나? 탁구부가 운동하는 체육관이지, 무신 강당이고! 느그들이 강당이 어딨노. 맨날 운동장에서 모이면시로. 근데 니 몇 학년이고? 일 학년이가? 집에 안 가고 와 여기 왔노? “
“ 지는 삼 학년인데요. “
안 그래도 지대범 보다 머리통 한 개가 확연하게 차이나 버려 속상한 애경의 약점을 찌른 낯선 배불뚝이 아재가 미워 애경은 쪽 째진 눈을 흘기며 앙칼지게 대답했다.
“ 니가? 진짜로? 그카믄 니 지금 탁구부 할라꼬 여어 왔나? “
“ 네. “
“ 고마 됐다 마. 니 같이 쪼메난 게 탁구대 위에 공을 우에 치노. 고마 집에 가서 느그 엄마 젖이나 더 묵고 온나. “
“ 아재가 뭔데 가라 카는교. 울 샘이 해도 된다고 했스예. 내는 할 건데 와 가라 카는데예? “
“ 앗따~ 요것 봐라. “
배불뚝이 아저씨는 팔짱을 끼고 애경을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째진 눈매가 보살 바구니의 다람쥐처럼 반들반들했다. 거기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입술과 옴폭 페인 보조개도 야무져 보였다. 짧은 팔다리와 깡충한 단발머리는 생김새와 어울리게 귀여웠지만, 아무래도 탁구를 치기에는 너무 작았다.
‘ 음… 피하지 않고 쳐다보는 눈빛은 참 맘에는 드는데… 그래도 너무 작은데… ‘
배불뚝이는 며칠 째 깎지 않은 턱수염을 만지작만지작 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심한 듯 나온 배를 숙여 애경과 눈 맞춤을 하며 다시 물었다.
“ 니 탁구는 억시로 힘든 건데 할 수 있겠나? “
“ 네, 지 공부도 잘해요. “
“ 진짜가? 그라믄 함 드가봐라. “
애경은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의 허락을 받고 강당 아니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애경이 안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체육관 구석에 하나 딸랑 있는 책상과 의자 쪽으로 가서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강당 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삼 학년 여자아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낯이 익은 친구도 있고, 같은 동네에 사는 소꿉친구도 보였다. 그중 유난히 키가 큰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남자처럼 짧은 곱슬 머리에 뚱하니 서 있는 게 키가 작은 애경이의 눈에는 유난히 띄었다. 성별이 헷갈릴 정도로 예쁜 남자애 얼굴 같았다.
" 자 다아 모여봐라. 어디 보자 9반까지 한 반에 3명씩이니까 93은 음... 음... 머꼬 꼬맹이 니 대답해 봐라?"
" 지는 꼬맹이가 아니라 박애경라고 말했는데예. "
"앗따 고놈의 가시나 아까부터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네. 그래 박애경 니 대답해 봐라."
" 27이요. "
" 그래 27명 다 모였는지 박애경 니가 함 세봐라. 그리고 느그들은 세줄로 길게 함 써봐라. 아홉 명씩 딱딱 맞차지게. "
우왕좌왕 애들이 줄을 서고 있는 사이 애경은 애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애들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세줄로 겨우 줄을 맞추는 친구들보다 애경이 먼저 다 스물일곱 명이 다 왔음을 배불뚝이 아저씨에게 알렸다. 그런 애경을 배불뚝이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난 후 아이들을 주목시켰다.
" 자자 조용히 해봐라. “
배불뚝이 손에도 반마다 샘들이 들고 다니는 사랑의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 내 소개부터 한다. 이름은 홍승재, 이제부터 느그들을 가르칠 탁구 코치샘이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샘이 가르쳐 보고 잘하는 놈 열명만 탁구선수로 뽑을기다. 샘은 두말하지 않겠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업 끝나면 다시 체육관으로 집합한다. 올 때 탁구 바따 하나씩 구해서 와야 한다. 알겠나? “
애들은 웅성웅성 탁구빠따를 어디서 사냐며, 무섭게 생긴 배불뚝이 코치샘에게는 겁이 나서 묻지는 못하고 옆 친구들에게 서로 묻기 바빴다.
" 조용! 왜캐 시끄럽노. 빠따는 알아서 구해오고,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모인다. 이상! “
“ 아, 그리고 야 꼬맹이 니 니 박 뭐라캤노? 그래 니 박애경이, 앞으로 니가 3학년 탁구부 주장이다 알겠나? "
" 주장요? 그게 먼데예? "
" 반장 같은 기다. "
주장이 뭔지는 몰라도 엄마가 학교에서 반장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애경이는 사실 주장이라는 걸 해도 상관없지만 혹시나 엄마의 걱정대로 뭔가를 사다 바쳐야 하는 그런 것만은 아니기만을 바랬다. 또 탁구빠따를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거기다가 방과 후에 모여서 한다니 동생들 밥은 어찌해야 할지, 강당에 입성하겠다는 욕심이 너무 큰 근심거리를 애경에게 떠안겨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뛰었다.
꼼보 엄마는 늦은 저녁을 차린다고 분주하다. 반찬이라고 해봤자 밥상 위에 덮어져 있던 보자기만 걷으면 맨날 먹던 그 반찬인데도 엄마는 부산을 떤다.
“ 야가 와 이카노. 니 시방 빨리 밥 묵고 잘 생각은 안 하고 와이케 보채쌌노. “
" 엄마 내 진짜 탁구하고 싶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동생들 밥도 잘 챙겨줄끼다. 약속할게 내 탁구 시키도. "
" 밥이나 묵자. "
애경의 엄마는 한 번도 지욕심 부린 적 없던 애가 방과 후에 탁구를 배우겠다고 때를 쓰는 것에 마음이 시려 그저 밥 타령만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허락해 주고 싶으나, 남편과 함께 돈 벌러 나가면 어린것들 밥은 애경이 아니면 누가 챙길지 막막하기만 하다. 저 속 깊은 것이 얼마나 하고 싶으면 보채겠냐만은 차마 허락할 수는 없고, 그저 귀한 밥만 꾸역꾸역 쑤셔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던 아빠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 와 더 안 드시는교? "
" 어 속이 안 좋네. 그만 묵을란다. "
조용히 아빠는 단칸방 밥상 앞에서 일어나 작은 부엌을 지나 밖으로 나가셨다.
" 저 양반이 와저라노. "
애경의 신체 조건은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왜소한 체구의 아빠는 매일 트럭에 온갖 잡화품을 싣고 깊은 골짜기 마을을 찾아다니신다. 작은 체구만큼이나 움직임에 소리가 없으신 아빠이다. 말수까지 적은 아빠의 다친 왼쪽 팔을 가족에게 늘 미안해하신다. 그래서 말의 수가 더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애경의 성격은 다행히 엄마를 닮았다. 똑 부러지는 성격의 엄마는 가난했지만 맞다 싶은 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단이 있다. 애경의 쪽 째진 눈에서 눈물이 또로록 흘러 내렸다. 예고도 없이 왜 눈물이 갑자기 나오는지 애경이는 화가 났다. 앙 다문 입속에 밥알이 알알이 따로 논다. 참으려고 하는데 목구멍까지 막힌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가로 밥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 내는 왜 하고 싶은 거 못하는데? 와 맨날 나만 못하는데... "
결국 터져버렸다. 콧물, 눈물이 허연 쌀즙과 범벅이 된 얼굴로 애경은 꺼이꺼이 울어 재끼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 엄마도. 애경이가 감당하기에는 어린 두 동생이 버겁다는 것을, 하지만 아빠의 왼팔은 운전만 겨우 할 뿐 물건을 들어 옮기는 것도 애경엄마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엄마는 애써 애경의 울음폭탄을 외면하며 동생들의 숟가락 위에 잔멸치 반찬 하나씩 올려 먹인다. 눈치 빠른 둘째 애순이가 언니 따라 눈물은 글썽이면서도 얌전히 밥은 받아 씹는다. 막내 경철이는 지 힘으로 먹겠다고 큰 숟가락을 뺏으려고 찡찡댄다.
엄마는 지쳤다. 남편의 잘못된 빚 보증의 끝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방바닥에 경철이가 헤쳐놓은 떨어진 밥풀을 입으로 옮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온 가족이 유일하게 모이는 저녁 밥상의 흰쌀밥이 아직 그득 남아있는데 밥상을 물려버렸다.
엄마는 몇 시인지 보지도 않고 이불을 펴고 동생들을 눕혔다. 벽 쪽에 누운 엄마 옆으로 동생들이 나란히 누웠고, 그 옆에 애경도 끄윽끄윽 울먹이며 이불을 덮었다. 잠이 올리가 없었다. 울음소리가 엄마에게 들릴까 참으려고 했지만, 잠도 울음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야간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자 아빠가 들어오셨다.
" 애경아, 니 해라 그거. 탁구 그거 해라. 아빠가 빠따 구해 오꾸마. 동생들 걱정도 말고 니 해라 그거 탁구. "
애경은 끄윽끄윽 참았던 울음이 크게 터졌 버렸다. 그 밤은 밥도 잠도 엉망인 밤이 되어버렸지만, 애경이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의 눈물도 섞여 있었다.
열살 인생에 어마한 변화가 올 것 같은 설렘이라고 할까, 묘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