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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

탁구야 안녕

by 길이


이진아, 어디야? 좀 만나자.


애경이는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이진이에게 문자를 남겼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탁구단을 뛰쳐나가버린 이진이, 그리고 퇴사 처리를 이진이 엄마가 서울까지 올라와서 마무리 지었다.


‘ 그래, 이진이는 원래 그런 애였어. 처음 탁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탁구를 떠나고 싶어 했었잖아. '


작년 봄 연희동 숙소 벚꽃나무의 꽃잎이 잔디밭을 뒤덮던 주말 오후, 교회를 다녀온 애경의 2층 방 책상 위에는 갈겨쓴듯한 메모 몇 자와 , 활짝 열린 창문이 이진이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다시 봄이 찾아온 창가에 걸터앉아 이진이와 같이 시작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처음 탁구라켓을 잡았을 때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심에 애경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학교 안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강당으로 입장하던 날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높은 강당 안 울려 퍼지던 탁구공 소리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맑고 정확한 소리였다. 똑딱똑딱 애경의 마음을 정확하게 두들겨 심장까지 쿵쾅쿵쾅 울리게 했었다. 그렇게 탁구는 다가왔었다.

그 후 탁구는 지켜야 했던 가족들을 위한 목표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이기는 방법만 생각하며 훈련을 했고, 나머지는 지우고 살았다. 그 지난 긴 시간을 이진이와 함께했다. 럭비공 같은 친구지만, 나보다 키도 훨씬 큰 친구지만, 누구보다 내 말은 잘 들었지만, 너무나도 감성적이라 냉정한 승부세계인 스포츠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친구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버틴 이진이가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인 것 같다. 몇년을 더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끝내야 할 것 같다.

스물여섯,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나, 할 줄 아는 게 탁구밖에 없는데 말이다. 지금의 나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이진이에게 털어놔야겠다. 중요한 국제경기 선발전을 기권을 하고 결심은 더 굳어졌다.

이진이가 빨리 답장을 주기만을 기다리며, 살짝만 움직여도 시큰거리는 손목을 천천히 움직여본다.


코칭 능력보다는 인간적으로 신뢰를 하는 코치가 달라진 애경의 눈치를 살핀다. 운동을 마치고 합숙소로 돌아오는 팀 버스 안으로 올라타는 애경에게 코치가 조용히 말을 건넨다.


“ 저녁 먹고, 나 좀 잠깐 보자. ”


숙소의 2층 테라스가 달린 방은 애경이의 방이다. 당연히 최우수 선수에게 가장 좋은 위치의 방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애경이는 저녁을 먹고 테라스에 앉아 바깥 풍경을 쳐다본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런 동네에 이런 주택에 살 수 있을까. 골목골목 가로등이 켜진 고급진 주택가를 쳐다보며 잡념에 빠지려고 할 때, 코치가 찾아왔다. 애경은 이미 결정한 답을 묻지도 않는 코치에게 던져버렸다.


” 샘, 저 그만둘래요 탁구. “


” 어? “


” 이제 그만할랍니다. 탁구. “


코치는 들썩거리려는 입을 닫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마 이미 예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너무 놀라 어떤 말도 찾지 못해 순간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애경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코치의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굳이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답을 들었다면 다시 들추어 괴롭히지 않는 너무도 인간적인 코치였다.

팀에서 나가는 대가는 혹독했다. 아직 빼먹을 게 많은 선수를 은퇴시킬 감독이 아니었다. 애경이 맞았다. 스물여섯 살 어른이 맞았다. 스스로 은퇴할 시기임을 판단하고 다음 단계를 어렵게 결정하고 팀에서 나가겠다는데 때리다니,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애경은 그 넓은 잔디밭을 품고 있는 이층 발코니 방에서 당장 나와 급한 대로 근처의 원룸을 구했다. 운동하면서 무늬만 대학생이었던 학위를 가지고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코치와 너무나 비인간적인 감독과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했다는 것에 애경은 씁쓸했다.

그런 인연에 연연하는 것은 애경이 답지 않다. 못했던 공부를 지금이라도 서둘러 시작해야 했다. 서울에서는 생각보다 대학원 진학이 쉽지 않았다. 결국 범위를 넓히다가 안동에 위치한 국립대학원에 드디어 합격을 하게 되었다. 애경은 뒤도 보지 않고 탁구를 관두고 대구로 내려갔다.

부모님께 마련해 드렸던 고향 작은 아파트에서 대구까지 출퇴근하며 짬짬이 안동까지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만난 대만에서 유학 중인 학생과 급속도로 빠른 연애를 진행했다. 그동안 탁구만 했고, 나머지는 지우고 살았던 게 아니라 미루고 살았던 게 분명하다. 탁구 외에 안 해 본 것들을 시작했고 서둘렀다. 침착하지 못한 건 애경이 답지 않은 짓이었지만 행복했고 하루는 짧았다.


1999년 1월 8일 겨울 정오의 햇살이 따스하게 신부를 비췄다.

고향 작은 교회 마당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부가 앙증맞게 이쁘다. 선머슴 같던 탁구부원들은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되어 눈부신 신부를 축하해 주었고 이진이도 함께 했다.

뒤늦게 연락을 한 애경이에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 이진이는 놀랐다. 탁구 은퇴에 대학원 진학, 고향집에서 대구로 출퇴근 중이라는 근황과 곧 결혼을 한다는 어마한 소식들 뿐이었다. 고작 안 본 일 년 반사이에 애경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애경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바보 신부가 되어 활짝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연애세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응축되어 있다고 한방에 폭발을 한 것처럼 탁구 여전사에서 한 남자의 여자로 만개하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 전 날 애경이를 꼭 빼닮은 아들을 낳았다.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애경의 얼굴은 벌에 쏘인 것처럼 울긋불긋 부어 있었다. 출산이 정말 힘든 것임을 결혼식때와는 다른 수분기 하나 없는 산모의 모습에 이진이는 또다시 놀랐다.


“아가 니캉 똑같네. 눈이 쪽 째진 게 완전 판박이네. 얼굴은 와 띵띵 부었노? 괘안나? ”


“ 아기 보고 왔나? 내가 봐도 내 새끼 맞더라. 그카고 얼굴은 제왕절개수술해서 그런가? 내 개안타 걱정 마라. ”


애경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훈련도 잘 견뎌냈던 악바리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두드러기가 잔뜩 오른 것처럼 울긋불긋하게 부어있는 꺼칠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때마침 간호사가 쉬어야 한다며 면회는 다음에 하라며 주사기를 들고 들어왔다.


“ 내 내일 다시 올게.”


“ 아이다. 퇴원하면 우리 집에서 보자. 우리 할 얘기 많타 아이가.”


“ 그래 그라자.”


다행히 애경이는 건강을 회복했다. 아기는 옹알이에 뒤집기를 하려고 용을 써대며 포기를 모르는 게 애경을 꼭 닮았다. 애경은 다시 대학원 복학을 계획했다. 남편도 한 학기만 더 공부하고 대만에서 돌아오면 육아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시댁 앞 마루에 앉아 홍조 띤 얼굴 위로 흐르는 이마에 땀을 식혀본다. 아직 봄인데 대구의 봄은 이미 한여름처럼 후덥지근하다. 안겨있는 첫째도 더운지 칭얼댄다. 아직 뱃속에 있는 둘째는 자는지 조용하다. 시누이가 거의 살다시피 하는 시댁은 항상 시끌시끌하다. 그늘이 되어주는 느티나무 밑 마루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잠시 쉬어본다.

크리스마 이브 날 둘째의 출산을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애경이를 또 닮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 출산때와 같이 두드러기 증세가 올라왔다. 이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 축하한다. 내 지금 갈게. 몸은 개안나?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붕어빵 사갈까? ”


” 응 괜찮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 내 얼굴이 또 엉망이라, 내일 온나. 보고 싶다. “


“ 맞나? 내 지금 니 병원 근처 동승로인데 이브날이라고 사람들 억시로 많타. 오냐 니 저번처럼 또 벌겋게 부었는가 본데 일찍 쉬그라. 고생했다. 내일 낮에 보재이. ”


” 응, 알았다. 내일 보자. “


애경의 목소리에 또 쇳소리가 섞여있다. 많이 힘든가보다. 이진이는 괜히 기분이 그래서였나, 성탄절 분위기에 취한 인파 속에 괜스레 센치해졌다.


붓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애경의 몸에 이상을 느낀 간호사가 의사에게 연락을 해서, 처방으로 내려진 약물이 링커에 급히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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