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고령화

by 길이


“ 어머, 내 핸드폰.”

정 차장이 또 뛴다. 이번에는 화장실이다.

오래간만에 달달한 돌체라떼를 쏘겠다고 해서 따라붙었는데 핸드폰이 없단다.


요즘 들어 요실금으로 화장실만 보이면 일단 가고 보는 정 차장이었다.


“ 선배 또,,,”


김 과장은 20년 지기 정 차장에게 잔소리를 하려다가 멈춘다.

새 차 뽑고 이케아 매장 가서 지하 2층에 주차해 놓고, 1층 가서 내 차 도난당했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정신 챙기라는 잔소리를 하겠는가. 냉장고에 식칼만 안 넣으면 다행이다 싶다.


큰일이다.

나날이 건망증이 심해진다.

입사 초기에는 총명하고, 나름 귀여웠던 우리들은 어느새 오십에 접어들면서, 몸도 생각도 둔해짐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출근해서 아이디 카드 인식하려고 하니, 차 안에 두고 내려 주차장에 뛰어가질 않나.

돋보기를 머리 위에 걸쳐 놓고, 안 보인다고 승객에게 읽어 달라고 하질 않나.

순간 암기력도 떨어져 항공권 12자리 숫자는 세 번에 나뉘어 입력을 하질 않나.

수하물 번호가 969454이면, 육구륙오사오 로 읽어 버리질 않나.


참으로 심각한 오십 대들이다.

더 심각한 건, 2015년 임금 피크제도가 도입되고 난 이후로 최고로 오십 대 직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년에 또 최고치를 찍겠지만 말이다.


키오스크 앞에서는 해외 지점장까지 한 부장들이 돋보기를 쓰고, 승객의 수속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이 누가 누구를 도와주고 있는지 참 묘하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관리자로서의 끗발 날리던 그들도 이제는 침침한 눈으로 아이폰 속의 자그마한 예약 정보를 읽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키오스크로 인해 버벅대는 것이 다시 신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십 년 전만 해도 오십에 접어들면 노인네처럼 쉬염 쉬염 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지금 오십은 한참 일해야 하는 청년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오십이 넘고 육십은 안 된 직원들이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기제대를 하지 않으면 실업 급여를 받지 못한다.

맨날 집에만 있으면 뭘 하겠나.

아직 아파트 경비는 아니다.

공인 중개사 시험이 점점 어려워져서 공부해도 안 되더라.


각자의 이유와 직장의 고령화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젊은 직원들보다 퇴사율이 낮다. 아니 거의 없다.


코로나로 지방 공항이 단기 운항 중단에 들어가면서 인천공항으로 발령 난 직원이 최근에 겪은 일이다.

지방 공항에서만 근무하다가 메인 공항으로 발령을 받으면 모든 것이 더딜 수밖에 없다.

오십이 넘어 낯선 인천공항으로 발령이 났을 때 관두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만, 아직 학생인 자녀를 위해 참고 업무를 배우고 있는 직원이었다.


셀프 수속을 하려던 승객이 초과 수하물이 발생하여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수하물 값을 지불하기 위해 그 직원의 카운터로 왔다.

늙어 보이는 직원이 더디게 금액을 계산하고 있는 모습이 그 젊고 예쁜 승객은 못 마땅했나 보다.


“ 할머니!

그럴 거면 집에 가서 계산하고 오시죠. ”


그 직원은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었고, 염색 알레르기가 있어 반백의 머리색으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직원들이 보기에도 유니폼에 어울리는 단정한 차림은 아니지만, 사정이 있어 염색을 못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에 화가 나서 상대에게 비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너무 무례한 말투에 옆에 직원들도, 승객들도 놀라서 멈칫하고 모두 그 승객과 직원을 쳐다보았다.


바쁘게 수속해야 하는 카운터에서 버벅대면서 일하는 게 못 마땅하기는 직원들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막상 그런 인격모독적인 말까지 듣게 되다니,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반백의 여직원은 못 들은 척하는 하며, 덤덤하게 천천히 추가 수하물 요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게 그 직원이 이겨내는 나름의 방법인가 보다.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직장인들은 감정 노동이 엄청나다.

서비스를 중요시하는 백화점, 호텔, 면세점, 항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게 오십 줄에 접어든 김 과장이 회사를 관두고 싶은 이유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상처가 되는 말을 받아 이게 제대로 내 감정에 꽂혀 버리면 며칠은 잠도 못 자고 헤어 나오질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삼키고 다시 일하면서 시간에게 의존해 희석시켜 참아온 세월이 길다.

오십이 되었으니 이제 무뎌져야 하는데,


말의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몇 번을 경험하면 내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트라우마 비슷하게 남는다.


어느 철학자의 글에는 '나이가 들면 심장이 마모되어 상처를 더 잘 받는다'라고 했다.

나이 들면 심장에도 굳은살로 무장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젊은 승객에게 무시를 당했던 그 직원이 최근 눈에 띄게 살이 찌기 시작한 이유가 마음의 상처를 해소하지 못해 결국 과식과 폭식으로 처방한 게 아닌가하고 걱정이 된다.

다행히 지방공항이 운항재개를 곧 한다니, 가서 심신의 안정을 찾길 바란다.


2년 뒤면 정년인 최 부장은 모바일로 예약을 보여주는 승객이 제일 두렵다.

돋보기를 써도 빨리 읽히지가 않으니 말이다.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승객이 핸드폰을 들이밀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초점을 맞추는 게 티가 팍팍 난다.


예전에 유럽에 여행에서 항공사 카운터에 가면 나이 든 직원들이 너무 많아서 참 칙칙했는데 , 이제 나의 직장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육십에 정년을 해도 국민연금은 5년이나 더 기다려야 하니, 뭐 다들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노후에 조금이나마 보태려고, 먹고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돋보기 쓰고 한 달에 두 번 뿌염하면서, 유니폼에 맞게 구색을 갖추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들의 고령화를 이해해 주고 응원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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