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띠 모임_멍이
멍이,
6년 전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다는 둘째를 위해 새끼 강아지도 못 만지는 내가 무슨 종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인에게 한 마리 얻어 가족으로 맞게 되었다.
쌍둥이의 외할머니는 개새끼를 어찌 집안에서 키우냐고 노발대발하셨지만, 귀하게 얻은 손자의 소원에 그
만 개새끼를 집안에 허락하셨다.
둘째만큼이나 강아지를 좋아했던 돌아가신 오라비가 고심 끝에 밝은 ’ 명‘이라고 지어 주었지만, 행동이나 초점 없는 눈빛이 너무 멍청해 보여 그냥 ‘멍’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멍’이다.
나와 첫째는 강아지를 몹시 무서워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강아지가 있으면 크던 작던 화들짝 놀랐었고, 그게 나도 이해가 안 되어 견주에게 놀란 것에 미안한 사과를 하곤 했었다.
까칠한 첫째와 달리, 둘째는 말문이 트이기도 전부터 강아지를 보면 뭐라 뭐라 하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외래어로 반겨댔다.
인큐베이터에서 고생한 둘째만 생각하면 해 줄 수 있는 것 다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라 두려움의 대상인 강아지를 집에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자연스레 바꿔버리면서, 어느새 세상 강아지 모두를 사랑하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무지로 처음에는 멍이가 소형견인줄 알았다.
각티슈 통에 들어가길 좋아했던 멍이가 10kg이 될 줄이야,
그 앙증맞던 코가 피노키오처럼 길게 나올 줄이야,
그렇게 멍이가 스피치와 어느 집 똥개의 작품인 것을 성견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6년의 세월을 같이 보내면서 멍이는 착한 막내딸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여전히 멍~한 멍이는 신기하게도 우리가 멍이에게 하는 말은 대부분 이해한다. 아마 멍이가 사랑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고향집에 내려가도 멍이는 어김없이 사랑을 받는다.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외할머니가 휘휘 저은 티스푼에 남아있는 달달한 커피의 맛이라도 보려고 딱 붙어있는 멍이와 그게 싫지 않은 할머니는 우리 몰래 가끔 커피를 주고받은 모양인 것 같다.
멍이도 아는 맛이니 할머니 곁에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돌아가신 오빠는 멍이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길 좋아했다.
어느 날 잘 다니던 공무원을 관두고 고향에서 산으로 강가로 돌아다니던 오빠는 멍이가 오면 길동무가 생겨 너무도 좋아했다.
흰둥이 멍이가 검둥이가 될 때까지 돌아다니다가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면 멍이도 오빠도 잘 보낸 하루의 얼굴이었는데, 난 단지 멍이가 꼬질 해졌다고 오빠에게 왜 그리 화를 냈던 건지 지금은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다.
나와 멍이는 쌍둥이 오빠의 하굣길 후문 앞에서 기다리기를 좋아한다.
학교 앞 벤치에 앉아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면서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하굣길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와 어우러져 상큼한 풍경이 되는 것이 참 좋다.
물론 멍이는 똑같은 교복의 무리 속에서 오빠들을 찾아내느라고 멍이둥절하고 있지만 말이다.
마침내 저 멀리서 오빠들을 발견하면 앞발은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꼬리는 무기가 되어 나를 퍽퍽 처대며 신나했었는데, 우리의 하굣길 마중으로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던 중2병의 오빠들의 항의로 더는 못하고 있다.
멍이는 둘째 오빠를 제일 좋아한다.
잘 때는 항상 둘째 오빠랑 같이 자야 한다.
불금에 오빠가 안 자고 거실에서 늦은 밤까지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오빠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곁에서 졸고 있는 오빠바라기이다.
둘째 오빠는 멍이가 배변패드 위에서 어마한 응가를 싸놓으면 냅다 치우고 칭찬 간식을 준다.
까칠한 첫째 오빠는 코를 막고 튀어 버리는 것을 멍이도 아는 눈치다.
강아지는 입이 무겁다는 것을,
멍이랑 살아보니 알겠다.
말의 실수는 무서운 것이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그냥 곁을 지키는 멍이가 좋다.
울고 있는 나에게,
위로의 말보다는 그냥 곁에서 체온을 전해주는 멍이가 좋다.
나는 그런 멍이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