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제주도 여행
꼬박 1년 만에 세 친구가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만날 때마다 함께 여행을 하는 우리들.
이젠 나이가 들어버려 모이고 싶을 때 바로바로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내 방학을 맞이해 방학 때 되도록이면 셋이서 여행을 가자고 마음을 먹어 한 달에 만원씩 회비를 모았다. 지난여름에는 주봉이가 몸이 좋지 않아 여행을 가지 못했다. 올 겨울에는 다행히 다 같이 모일 수 있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제주로 향했다. 국내지만 이국적인 제주도는 요즘 관광객들로 핫플레이스가 됐다. 널찍하고 자연이 함께하면서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은 관광의 섬 제주도.
둘 째날 동백꽃을 보러 가는 길에 카페 앞 길가에 고양이가 노려보고 있었다.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무척 따뜻했다. 이번 모임도 내게 그러했다. 창주는 공기업맨으로 주봉이는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놈들의 좋은 소식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말 나를 기쁘게 한다.
겨울에 핀 꽃을 보니 내 마음도 밝아졌다. 연초에 날씨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여행할 때에만 햇빛이 쨍쨍했다.
나는 동백꽃이 이렇게 커다란 나무도 있는지 몰랐다. 꽃이 어느 정도 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피어 있는 꽃도 이쁘지만, 지는 꽃도 여전히 이쁘다. 꽃잎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떨어지는 것들도 이렇게 모이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어릴 때는 늘 화려하고 창창한 피어있는 꽃잎들만 좋아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변한다.
텔레토비 동산에 온 것 같았다. 맑은 하늘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독일은 흐려서, 한국은 미세먼지가 끼어서. 구른 한 점 없이 파아란 하늘을 보니 정말 행복하다.
늘씬한 모델이 벽에 기대어 포즈를 잡고 있는 듯한 착시에 빠진다.
전날 홀로 과음한 주봉이를 차에 재우고, 두 명에서 근처 핸드드립 카페에 왔다. 나는 핸드드립이 좋다. 2-3분간 고요하게 커피를 내리다 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몰입의 효과다. 핸드드립은 커피의 기름을 걸러 풍부하고 깔끔한 맛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남은 커피 찌꺼기는 좋은 방향제가 되므로 자취생들에겐 더욱 유익하다.
다음으로 쇠소깍에 왔다. 쇠소깍은 절리로 이루어진 작은 만으로 바닷물이 그대로 들어와 마치 맑은 계곡을 보는 것 같은 형상을 이룬다. 사람들이 유유히 카야킹을 하고 있었다. 단체 유람을 시켜주는 목선에 선장님이 나무데크 위 우리를 보시더니 바다에서 귤을 던져 주셨다. 크으 제주도 클라스.
파아란 에메랄드 빛 바닷물이 참 좋았다. 우리 마음도 더욱 맑아지길 바란다.
쇠소깍을 산책하며 돌다 보니 바다가 있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연신 물수제비를 빚었다. 동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한쪽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담아 돌들을 쌓아 두었다. 돌탑 위에 우리도 난도 높은 돌을 쌓아 2020 새해를 기념했다.
쇠소깍 2. 날씨가 맑아 더욱 좋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자연이 있고, 그것을 제주도는 잘 보존해 관광자원화했다.
우도 땅콩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라고 홍보 중이었다. 궁금해서 먹었는데 그냥 아몬드 맛이었다. 그래도 역시 이런 간식은 셋이서 가위바위보로 몰아주기를 해야 제맛이다. "하자는 놈이 걸린다" 역시 진리였다. 공짜로 먹으니 더 맛있었다.
제주도의 맑은 하늘과 돌담 그리고 귤. 올해는 귤이 풍년이라고 했다. 곳곳에 나무가 있었고, 나무엔 귀엽게 귤들이 열려 있었다. 열매만 따 먹다가 나무에 걸린 귤을 보니 귀여웠다.
다음 코스로 산굼부리로 왔다. 화산지형 옆에 형성된 억새풀 밭. 현무암이 가득했다. 파아란 하늘 아래 우리는 한 바퀴 산책을 했다.
따뜻한 하늘 아래 억새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리 삶도 그렇다. 좌우로 흔들려도 항상 그 자리를 뚝심으로 뿌리박은 채 버틴다.
어쩔 땐 오른쪽으로 어쩔 땐 왼쪽으로.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지금의 자리를 소신을 가지고 지키며 나아갈 뿐이다.
억새
검색을 하다 핫한 귤 농장에 왔다. 카페가 귤 담는 박스와 똑같이 생긴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저 건물이 궁금해 방문했다. 사실 음료는 가격은 비싸고 맛은 너무나 평범했다. 하지만, 귤 농장 체험을 위해서는 음료를 마셔야 했다.
넓은 땅에 귤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귤이 맛있을까? 주봉이는 큰 귤일수록 맛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요즘 먹는 귤을 보면 작은 귤을 특이한 농법으로 재배한 것이 있는데, 그 귤이 더 맛있었다. 허우대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결국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의 귤나무들은 귤이 씨가 말랐으나, 조금만 안쪽의 귤나무에는 귤들이 주렁주렁 있었다. 농장에서는 얼마든지 귤을 따먹고 남은 껍질을 버려라고 통들이 곳곳에 있었다.
언젠가 브런치에 적은 적이 있다. 나는 쉬운 길'만'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협재해수욕장에 왔다. 해수욕장이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물이 맑았다.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상쾌함. 이런 자연 자체가 나는 참 좋다. 수없이 많은 여행을 했지만, 결국 남는 건 자연 그대로와 사람뿐이었다. 저 멀리 한 아이가 바다를 보며 사색에 빠져 있었다.
아이야, 너는 무슨 고민이 있는 거니?
2019의 묵은 때를 벗기고, 2020에는 더 맑고 깨끗한 삶을 살기를 다짐했다.
31살이 된 아재들의 발통들. 연초부터 좋은 일들이 많이 들려 참 좋다. 늘 옆에서 함께 해주는 너희에게 고맙다.
오래 연애한 창주와, 얼마 전 여자 친구가 생긴 주봉이는 여자 친구들의 이름을 새기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적은 눈꼴 신 낙서에 손을 대 사람들의 이름을 막 바꾸고 있었다. 한글은 참 과학적이다. 직선 두 개만 있어도 사람 이름이 확 바뀌니 하하하하하하하하.....................ㅋㅋㅋ. i.e., 주봉 -> 추뽕
아디오스, 고추튀김들아. 너희들의 경사는 나의 경사이기도 하니. 고맙다 나의 새해가 기쁘게 해줘서.
다음 여행도 기다려진다. 여행은 망각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나도 너희도 올 한 해는 더 건강히, 더 즐겁게, 더 맑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