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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Apr 03. 2020

밀 <공리주의>를 읽고




마르고 닳도록 암기했던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뜻은? 


한 번쯤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이나 주변 사람들의 지나가는 말 정도로 공리주의 혹은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딱 그 낱말만 알고 있었지 그 이상 어떤 의미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사상가다. 나는 그의 저서 <자유론>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알고 보니 그가 공리주의 철학을 정리하고 갖가지 비판을 상쇄시키는 글을 지었는데 그것이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이다. 


당신은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의 뜻을 아는가? 공리주의의 뜻을 아는가? 나는 말 그대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부족한 식견은 딱 거기까지다. 틀리지는 않은 말이나, 옳은 해석도 아니다. 이 책은 밀이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무엇이 효용이고, 도덕이며, 정의와는 어떤 관계를 이루며 구분이 되는지 등을 형이상학적으로 잘 정리해두었다. 따라서, 단순히 많은 행복을 많은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뜻을 이해해버리면 오해밖에 되지 않는다. 


공리주의의 Utilitarianism은 Utility라는 단어와 맥락을 같이한다. 유틸리티는 경제적인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한 뒤 얻게 되는 이익의 크기, 즉 효용을 말한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공리는 공동의 이익이 영어로 (common wealth 혹은 benefit 정도?) 아닌 또 다른 한자를 쓴 공리(Utility) 그 자체다. 이렇게 제목부터 구분을 짓기 시작하니 도무지 최대 행복의 의미가 최대 다수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리송해진다. 


이 책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 삶의 목표와 도덕, 효용, 정의 등이 어떤 정의이며 무슨 관계를 맺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므로 내용 정리를 위주로 이 글을 이끌어 가보겠다. 




먼저, 공리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용'이다. 번역본 그대로 인용을 하자면, 효용은 쾌락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쾌락 그 자체로 보았다. 따라서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행복을 증진하는 행동이 옳은 것이며, 반대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효용, 즉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쾌락 이 두 가지가 목적이자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다 (-29p). 

도덕은 옳고 그름을 정하는 내 안의 하나의 격률이다. 인간이 살면서 옳은 것은 장려하고 옳지 않은 것은 멀리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일까? 밀은 공리주의를 빌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이거나 쾌락이 가득한 상태, 즉, 두 개 합쳐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얼마나 지극히 당연한 말인가? 행복하기 싫은 사람이 있을까? 그 당연한 말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고전의 묘미다. 


인간 행동을 규율하는 지침으로 (=도덕) 간주되는 효용 (=여기선 행복) 기준은 행위자 자신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한데 합친 총량이다.

여기서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 같다. 사실 최대 행복은 있어도 최대 다수라는 말은 번역된 책에 안 나오던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양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아닌듯하다. 다음을 보자. 


고상한 인품(=품위)의 소유자가... 언제나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 결과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경우, 자신의 이익이든 다른 사람의 이익이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의 행동의 목적일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덕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36p)

즉, 이 원리에 따라 내 행복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진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이 증가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혹은 <국가>에서 드러나는 그의 대화방식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주로 질문을 통해서 하나의 개념을 일상의 예시와 지극히 당연한 요소를 통해 조금씩 분해하며 논리적으로 다가가는 느낌이었다면, 밀의 사유방식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다. 마치 머릿속에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는 듯한 착각도 든다. 


타고난 능력이 월등한 존재일수록 어지간한 것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보통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기도 훨씬 쉽다... 대체로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품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품위가 행복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비슷할 경우 우월한 사람이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 비해 행복을 덜 느끼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과 만족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혼동한 결과다... 만족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을 것이다... 그는 참는 법을 배울 것이고.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이 나온다. 만족과 행복을 구분하라.. 즉, 품위가 높은 사람의 예시를 들어 높아진 눈높이로 인해 느끼는 행복을 적게 느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만족이 적은 것이지 행복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의 하나의 단면을 드러냈다. 또 다른 레토릭을 보자.


도덕적 능력은 비록 우리의 자연적 본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 온 것이다... 이 능력은 강력한 외부적 제재와 어린 시절의 영향에 의해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라날 가능성도 있다. (-73p)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려는 능력은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 자연적 본성 중 하나는 아닐 수 있으나 어떠한 본성이 존재하고 그 본성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파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나름의 도덕적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것이 유년시절의 경험과 자극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형성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크게 공감한다. 소크라테스도 프로이트도 유년시절의 경험과 자극에 대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혼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을 위한 다방면의 교육을 국가가 수행해야 함을 역설했고, 프로이트도 그 유명한 <꿈의 해석>을 통해 유년시절의 경험이 정신분열증과 같은 성인 정신질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정리했을 정도다. 


요즘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가정 및 교육, 사회화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다수의 원인이 다름 아닌 유년시절에 있다고 한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은 지적 호기심을 잃고 나면 보다 높은 것에 빠져들 시간이나 기회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그런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도 사그라지게 된다. 대신 열등한 쾌락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나는 여기서 나태를 떠올렸고, 나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데 일부분 동의한다. 


중간 정리를 하자면, 공리주의는 행복이 바람직하다고, 행복이 하나의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목적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단, 어떤 1차 원리도 이성에 입각한 증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왜 행복을 원하는가를 증명할 수는 없으나 다만 '그렇다'. 고로, 왜곡된 도덕을 가지고 있거나 덕이 부족한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에 밀은, 그 사람이 덕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 덕에 대해 생각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반대로 덕이 결여되면 고통을 느끼게 해야 된다라고 말했다. (94p)


또 다른 행복의 성질을 살펴보자. 


때로는 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며, 돈보다 더 고상한 다른 목적에 대한 갈망이 전부 사그라질 때도 돈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질 수 있다... 처음에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행복에 관한 개인의 생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행복이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의 전체다. (-87p)

행복은 바람직한 것, 갈망하는 목표의 성격을 가진다 했다. 그것이 일상에서는 목표를 위한 수단이었다가도 목표 자체에 포함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주변엔 위 사례와 같은 사람이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럼 사람마다 이렇게 다를 수 있는 도덕, 행복에 대한 정의를 무조건 다 따르는 것이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옳은 상황인가? 이 책의 후반부는 정의와 효용의 관계를 정리함으로써 그 해답을 내놓는다. 


정의라는 말의 뜻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결국 각자가 효용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107p)... 정의와 도덕 일반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둘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도덕을 전부 정의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115p)

정의(justice)는 법적인 용어에서 탄생했다. 즉, 해서 처벌받을 수도, 하지 않아서 처벌받을 수도 있는 그 기준이다. 언뜻 옳고 그름을 뜻하는 도덕 격률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다시 벤다이어그램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효용, 즉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기준이 다양하다. 또 정의라는 의미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용어를 구분하자는 의미다. 


밀은 여러 사례를 든다. 


자유와 평등의 담론, 세금 징수 기준에 대한 다양한 의견 등 우리 주변에는 정치적으로 상충하는 여러 사례가 있다. 이는 곧 정의가 상충하는 것인데 그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밀은 이 경우에 정의라는 것은 양면성을 띠므로 반대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조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면 좌우 이념 대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가? 협력의 여지는 없는가?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그 정의라는 것은 턱없이 자의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사회적 효용 (social utility)이라는 개념을 동원해야 정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국가> 1장에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언쟁을 보는 것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약자를 위한 배려인가? 강자의 편익인가를 논하듯이 말이다. 흥미롭게도 밀은 단언컨대 공리주의의 방식으로 해결이 된다고 주장한다.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 (즉, 옳고 그름의 잣대)이 되고 그 어느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132p) 

그 다양한 정의의 기준이 효용을 기준으로 도덕성을 단죄한다면 된다고 밝힌다. 어쩌면 정말 간단한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인간 상호 간에 해를 끼치는 것을 금지하는 도덕 규칙은 인간사의 일정 영역에 대해 잘 관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만 가르쳐주는 그 어떤 격률보다 인간의 복리를 위해 더 중요한 역할이다 (132p) 이 예시에서는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안전에 대해서 밝힌다. 즉, 해를 끼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도덕이자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효용이므로, 그 기준에 따라 공통된 정의가 성립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정의와 관련 있으나 정의와 구분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다. 


정의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예외적 상황 아래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요구되는 몇몇 일반적 격률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특정한 도덕적 요구를 지칭한다고 정의에 대한 공리주의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예수이다. 밀은 공리주의가 실은 가장 심오한 종교적 색채를 띤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는데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제시한다. 


신이 무엇보다도 피조물의 행복을 원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그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이라고 진정 믿는다면, 효용은 신을 배제한 이론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심오한 종교적 성격을 띤다 (53p)

즉, 이리하여 무신론에 근거한다라는 비판을 비껴갈 수 있었다. 밀은 또,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를 너 스스로 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가르침이야 말로 공리주의 도덕의 완벽한 이상 (46p)이라고 말한다. 


휴, 짧을수록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그 깊은 심오한 뜻을 인용과 더불어 풀어쓰려니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려운 글을 어렵게 이해하지 않고 쉽게만 이해하려면 그 또한 모순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책의 형이상학적 구분하는 부분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효용이라는 기준이 서로 다른 정의의 상충을 완화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 우리 사회, 우리 정치에 하나의 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행복하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이토록 복잡하지만 논리적으로 반박에 재반박을 걸치며 주장을 펼치는 것이 고전의 맛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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