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눈을 뚫고 학원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명이 넘어야 할 조교들의 숫자가 고작 예닐곱밖에 되지 않았다. 대기하던 조교들은 원장님의 브리핑을 듣기 위해 교무실에 모였다. 낯선 사람들. 그들 중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재수 동기로서 학원에서 오며 가며 얼굴이라도 본 사람은 두세 명에 불과했다. 미리 파악한 대로 남양주 기숙학원 출신 선배들이 꽤 있었다. 간단하게 신록 원장님의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학생 실장님께 인계되었다. 도중에 늦었던 조교들이 학원에 속속 도착했다. 우리는 오후 늦게서야 모두 모였다. 완전체가 된 후 수학 조교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급식을 먹고 다시 교무실로 모였다. 다음으로 반배정이 우리를 기다렸다. 두근두근. 실장님께서 우리에게 갑자기 종이 한 장을 건네셨다. 종이에는 학급 이름, 담임 선생님 성함, 학년과 수준, 그리고 계열이 적혀있었다. 오호라.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이다.
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학원에 다시 들어온 것은 첫 째, 대입 결과를 초조하게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기다리느니,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재밌게 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초조함도 날리고 수험생활에서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내 인생 첫 아르바이트의 동료들은 의미심장했다. 실장님은 우리끼리 알아서 정하라고 말씀하시고는 휙 들어가 버리셨다. 독사... 당신은 도덕책...
".............(침묵).............."
어색함이 흘렀다. 조교들은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던 때다. 그런데 반배정을 우리끼리 해야만 했다. 수학 조교들은 문, 이과 출신이 골고루 섞여있었다. 뽑고 나니 그렇게 됐단다. 교육과정의 구조상 인문계열 출신 수학 조교들은 무조건 인문계열 학급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나도 인문계열 반으로 배정을 받는다는 말이다. 서로 어색하게 고민하던 중 누군가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으니 나이 순으로 합시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초면엔 나이다.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다. 결국 광주와 남양주 출신이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먼저 남양주 선배들이 맘에 드는 반을 가져갔다. 그때 나는 고3 최상위반을 맡고 싶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수학 조교들은 상위권 반을 기피했다. 잘하는 애들의 질문이나 문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의 조교들 모두 출중한 수학 실력을 겸비했다. 그럼에도 다들 배움이 아닌 가르침의 입장에서는 처음이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최상위반에 배정되면 어려운 문제를 풀어줘야 할 가능성은 높다. 그 말은 곧 학생들 앞에서 문제를 풀어주지 못해 부끄러운 상황을 마주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수능 만점이라는 은근한 자신감이 있었다. 잘하는 반에 가야 막연히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줄 때 내 수학 지식이 빛을 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위권 반의 학생들이 내 지도를 수월하게 따라올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수학을 가르치기 편하지 않을까 하는 역발상이었다.
남양주 선배들의 손을 거치고 드디어 광주 후배들의 손으로 반배정 표가 넘어왔다. 네다섯 명의 남양주 선배들은 전부가 문과 출신이었다. 그 말은 내가 가고 싶은 고3 최상반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고 혹은 남은 광주 후배들과 치열한 경쟁을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계열의 수학 조교들은 계열에 상관없이 모든 반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종이를 보니 예비 고3 문과 최상반이 남아 있었다. 남양주 선배들은 예비 고3 중, 하반 고1반 그리고 재수 선행반 하반을 선택했었다. 역시 쉬운 반으로 몰려있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차례다. 초면의 사람들이 모여 상의를 했기에 서로 양보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혹시 누군가 고3 최상반을 노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찰나, 담임 선생님의 성함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윈터스쿨 예비 고3 상 MF 담임 박성식 선생님"
나와 인연이 깊은 선생님이시다. 재수 때 담임이신 정 선생님과 절친하시면서 우리 반 부담임을 해주셨던 분이다. 부담임의 역할은 담임선생님이 휴일이어서 부재중일 때 대신 봐주는 것이다. 종례를 통해 종종 박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명분이 생겼다. 연고가 있는 선생님의 반으로 가겠다고 하면 되었다. 언제 말을 꺼낼까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선수를 쳤다.
"저는 우리 부담임 선생님이 계시는 고3 최상반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연고가 있는 선생님의 반을 하나씩 집었다. 그렇게 MF 반으로 반 배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성함 아래에 내 이름을 적었다. 모든 조교들의 반 배정이 드디어 끝이 났다.
고3 문과 상 중 하 3개 반
고3 이과 상 중 하 3개 반
고2 문과 상 중 하 3개 반
고2 이과 상 중 2개 반
고1 상 하 2반,
이렇게 13개 반 배정이 모두 끝이 났다.
학원은 이미 입소한 윈터스쿨과 재수 선행반의 학생들로 인해 북적이고 있었다. 입소와 개강은 날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학생들이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나면 바로 수업에 돌입하는 시스템이다.
설렌다. 누가 우리 반이 될까? 내 첫 학생들은 누굴까? 어서 보고 싶었다. 실장님께서 일은 개강일부터 시작하고 그전에 각자의 반에 들어가 학생들과 담임 선생님께 소개를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선배로서 학생들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나는 여전히 대학생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곧 복도에서 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반 맡았어요. 헤헷, 선생님 반 애들은 좋겠네요. 제가 조교로 와서. 하하!"
"그래? 좀 많이 불안한 걸? 큭큭."
반 배정을 받은 나는 드디어 정식으로 수학 조교가 되었다. 설렌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에 투입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