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상남 Feb 09. 2019

못 볼 것 다 본 사이

자연미를 강조하다

윈터스쿨 조교를 하면서 크고 작은 수업들을 진행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진행했던 특강부터 근무 시간 이외에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했던 '과외'까지. 


원래 내 근무 시간은 오후 10시까지 인데 밤 12시까지 수업이나 질의응답을 하기도 했다 뭐 내가 좋아서 해주는 것이라 딱히 체력적 부담이 크진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자기가 즐기며 하는 모든 것들은 전혀 힘들지 않다. 어차피 새벽까지 다른 조교들과 수다를 떨면서 놀거나 교재 연구를 할 테니까.  윈터스쿨 5주 중에서 약 3-4주를 그렇게 보냈다. 


한 번은 우리 반 학생인 동조와 혜지가 나를 찾아와 과외를 해달라고 했다. 내신 준비를 위해 학원에서 짚어주지 않는 단원을 심야 자습시간을 통해서 보충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놈들이 벌써 정치 맛을 알았는지 지혜로운 것인지, 원장님께로 곧장 달려가 민원을 넣었단다. 위에서 오더가 바로 내려왔다. 


각 지역에서 학생들이 올라오니 참 다양한 커리큘럼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 두 아이들은 겨울방학이 끝나자마자 학교로 돌아가 내신시험을 치르는데 뒷 단원인 확률과 통계를 기숙학원에 오는 바람에 배우지 못했다. 학원에서도 수업 중에 다루지 않는 사각지대인 셈이다.  이렇게 구멍을 보충하는 것도 수학 조교들의 역할이었다.


심야 자습시간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는 시간에 기숙사 사감의 감독 하에 선택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다. 욕심이 있어 더 공부하려는 사람들 15% 정도는 꼭 신청을 한다. (*나는 추천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이용해 이들과 희망자들에게 생애 처음으로 과외를 했다. 


이 특별한 수업을 위해 역시나 나는 교재를 직접 제작하고 가르칠 부분들을 꼼꼼히 메모했다. 같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특별함을 위한 나만의 작은 배려는 필요하다. 부수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수의 사람들이 나를 믿고 찾아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나 할까. 나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필요한 부분들은 모두 담아두되, 최대한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보충수업의 상이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고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람은 실전을 통해 성장한다. 


보충수업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다. 모두가 잠든 이 고요한 시간, 나는 빈 강의실에서 세네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일단 일과가 끝나는 밤 10시가 되면 모두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일이 조금 일찍 끝나 방에서 조금 쉬었다 수업을 하기로 했다.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리듯 샤워를 하고 말끔하게 씻었다. 아이들도 점호를 마치고 편한 복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나도 그냥 흰 티셔츠 하나에 편안한 츄리닝 바지를 입기로 했다. 항상 깔끔한 복장으로 학생들을 만나다가 편한 복장으로 만나게 되니 조금은 어색하다. 하지만 편한 걸 어쩌리.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날은 우리 반 교실에서 진행했다. 넓은 칠판을 단 3명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판서도 다수 앞에서 하듯이 큼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작게 쓰니 글씨도 좀 더 이뻐진 것 같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끔하게 씻은 아이들의 뽀얀 얼굴을 보니 조금은 웃기다. 보는 학생들도 "선생님 그런 복장 입으니까 뭔가 더 친근해 보여요"라고 칭찬인지 흉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연신해댔다.


그런 농담도 잠시 우리는 수업에 젖어들어갔다. 역시나 진지함과 유함을 모두 겸비해야 했던가. 놀 땐 놀고 할 땐 하자였던가. 그런 모습을 우리는 함께 갖추어 나갔다. 침을 동서남북 튀겨가며 수업을 하던 나, 그런 나를 초롱초롱한 눈 빛으로 행여나 한 자라도 놓칠까 긴장하며 바라보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여느 때처럼 수업에 몰입하였다. 옆에 쥐새끼가 한 마리 기어가도, 파리가 윙윙 거리며 날아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정말 찰나와 같이 지나갔다. 수업의 내용이 재밌거나 수업의 전달이 재밌게 되거나, 아니면 그 시간 자체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면 당연한 느낌이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다수의 아이들이 교실로 우르르 들어온다. 아니! 노크도 없이 들어온단 말이야? 수업을 방해해? 방해애애ㅐㅐㅐㅐ?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리 반 여학생들이었다. 아니,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갑자기 들어오는 건지. 그 아이들은 심야 자습을 마치고 교실에 책을 두기 위해 잠시 들른 아이들이었다. 나도 놀랬지만, 조용히 진행했던 그 수업을 목격한 그 아이들도 내심 놀란 눈치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나의 '꼬락서니'.


말이 좋아서 편안한 복장이지 이건 거의 잠옷 수준이다. "아니, 수업을 잠옷 차림으로 한단 말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수업을 편안하게 진행하자고 서로 암묵적인 약속을 하고 진행한 지 1-2주는 되었으니 우리끼리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신혼부부가 어느 센가 자연스럽게 방귀를 트고, 뿌웅뿌웅 껴대는 이치와 같지 않을까. 허허허.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신혜, 승혜, 수잔이 이 3명의 얼굴을. 그들은 나를 보곤 잠시 놀라더니,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출입문을 열고 일렬로 들어오면서 고개를 동시에 칠판으로 돌렸다. 그리고 동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나한테 던진 한 마디.


"우와 선생님 그러고 있으니까 엄청 자연스러워 보여요."


"맞아요, 엄청 웃기다 ㅋㅋ"


"아이 왜 이래, 부끄럽게..."


"아니에요 진짜 훤~하게 생겨가지고 그렇게 입으니까 엄청 애기같다ㅋㅋ"


그냥 흰 셔츠 한 번 입은 걸로 뭘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하는 것인지. 5주 동안 같이 살다시피 하니, 결국 이런 모습도 보이게 됐다. 뭐 사실 그것이 또 다른 재미면 재미랄까. 크큭.


근데... 얘들아 그거 아니?


늬들도 엄청 편. 해. 보이긴 마찬가지거든?

늬들도 엄청 편. 해. 보. 이긴 마찬가지거든?

늬들도 엄청 편. 해. 보. 이. 긴. 마찬가지거든?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선생님 철학 -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