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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10. 2019

기숙사 습격 사건

feat. 우리 반 여학생들

두 번째 윈터스쿨에서 일할 때의 일이었다. 유리방에 갇혀, 때로는 우리 안의 동물처럼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일을 하던 때였다. 나는 학원 2층 복도 안쪽 끝에 있던 예비 고2 반 담당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동생들과 많이 친해져서 서슴없이 지내던 무렵이다. 수학 조교들은 많은 인원 탓에 1층 복도의 숙소와 2층 복도의 숙소를 하나씩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1층에서 문경이, 건희, 석이 그리고 주봉이와 함께 방을 공유했다.


말을 많이 하는 일이다 보니 점심을 든든히 먹고 출근을 해도 금방 배가 고파지곤 했다. 종종 질문자가 없거나 짬이 날 때 숙소로 몰래 내려가 숨겨둔 컵라면을 한 사발씩 하고 왔다. 분명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하던 애들인데, 한 명이 내려가서 라면을 몰래 호로록하고 있으면, 꼭 다른 조교가 방문을 열고 스윽 들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요기를 했다. 간식을 먹고 올라가 다시 2시간 정도를 버티면 저녁시간이었다. 다 같이 급식을 먹었다. 윈터스쿨 초반에는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서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질문지에 아이들이 몰래, 나의 휴식시간으로 남겨둔 빈칸에 자기들의 이름을, 그것도 가지런히 칸을 이쁘게 나눈 후 적어놓고 간다. 그러니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양치를 하고 나면 바로 근무에 자동 투입됐다. 그렇게 찾아오는 학생들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밤 11시까지 열변을 토하며 일을 하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팠다. 드디어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모두가 잠드는 고요한 밤 시간, 조교들의 자유시간이 진정으로 펼쳐졌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오랜 친구들인 이 살들을 그때 야식으로 매일 먹어치운 후라이드/양념 치킨들이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와 막간을 이용해 쉬고 있었다. 우리 숙소는 솔직히 남자들끼리 살아서 그런지 조금 지저분했다. 다 먹은 컵라면의 종이컵들이 방 이곳저곳 침대 아래까지 뒹굴고, 먼지 낀 양말도 뒹굴고, 추운 겨울 차가운 베란다에는 시내 이마트에서 공수해온 새 컵라면들과 극한의 추위 속에 얼어버린 맥주병들이 있었다. 주봉이는 어지러운 방의 탓을 나에게 돌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보다 강적들이 많았으므로. 호홋. 치우는 사람,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어서 고생했다 주봉아. 근데 같이 지내보니 너도 만만치 않았다. 낄낄.


내가 묵은 1층 숙소는 학생들이 밥을 먹으러 가는 통로에 있었다. 밥을 일찍 먹고 들어와 있으면, 급식소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그러다 보니 보통은 숙소 작은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사생활을 보호해야 했다. 우리끼리 방에서 가끔은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고, 기타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중간에 샤워를 한 뒤 웃통을 적나라하게 까고 방안을 배회하기도 했다. 뭐, 여느 남자 기숙사와 다를 것이 없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우리가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아이들도 우리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몇 주가 지나면서 허물이 없어졌다. 


학생들은 조교들 숙소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려두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조교들이 항상 학생들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날은 유독 다 같이 음악을 듣다가 심취해 버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침 순번상 밥을 일찍 먹고 교실로 들어가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는지 누군가 우리의 문을 발칵 열었다. 우리 반 지혜를 선두로 2-3명의 여학생들의 보랏빛 체육복과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천방지축 웃으면서 들어오는 아이들이 정말 찰나의 시간을 머물다가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쌔애애애앰~ 뭐해요오? 아흫흐ㅎ 어흫 방 진짜 더러워!"


순간 방안에 있던 우리는 벙쩌버렸다. 


'우리 방이 어때서?'


꿀릴 거 없이 당당하다. 아암~, 부조화 속에 조화가 있는 법이지. 그렇지만,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아이들의 놀림에 시달려야 했다. 언제 퍼졌는지 들어오는 아이들마다 방에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철없는 남자들은 그걸 또 어떻게 여학생들에게 들었는지, 연신 나에게 졸라대며 하는 말이


"형 저도 라면 좀 먹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설마 그 찰나와 같은 시간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컵라면 통을 본 것인가. 아니면 냄새가 밖으로 흘러나간 것인가?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의 질문을 받아주던 유리방 안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하나 걸려있었다. 거기에 언제부턴가 하나, 둘 씩 방명록처럼 글을 남기고,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누가 내 캐리커쳐를 그려놓더니 화살표를 찌익 그어 "방이 레알 더럽다"라고 적어두었다. 그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뒤로 돌아서는, 2011년 초 겨울의 지혜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웃고 싶지만 울고 싶은, 웃픈 해프닝. 여학생들의 기숙사 습격... 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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