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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12. 2019

방과 후 서비스 (1)

부산 가정 방문

돌이켜 보니 최근까지 꽤나 긴 시간을 멘토링에 투자해왔다. 내겐 지금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다. 많은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각별히 친해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중에는 또 특별히 가정방문까지 성사되곤 했다. 함께 오랜만에 공부를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공식 시간이다. 사실 동생들을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대학생이 되면 놀기 바쁜 대학생이어서, 학생일 땐 공부하기 바쁜 학생이여 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추억이 되어 어딘가에 고이 간직될 뿐이다. 그것이 관계의 일상이다. 처음에는 함께한 추억이 잊히는 것 같아 서글펐다. 이내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삶은 그렇다. 단지 글을 통해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특별하다.


2011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윈터스쿨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했던 동생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 서울에서 가깝거나 내 고향에서 가까운 동생들은 직접 만나 식사를 함께하거나 드문 경우 가정방문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연히 나는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정애와 수연이가 연락을 해왔다. 원래는 정애를 위한 가정방문으로 계획되었는데, 마침 부산과 가까운 울산에 사는 수연이가 합류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들의 만남의 명분은 보충수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도 하고, 또 서로가 어찌 사는지 겸사겸사 안부도 물을 수 있다. 정말 특이한 상황이지만, 나는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다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는데 거리가 문제랴? 


정애는 묵묵히 공부를 열심히 하던 두 번째 윈터스쿨의 우리 반 학생이었다.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에 우여곡절 끝에 들어갔으나,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학교생활과 본인이 그 속에서 뒤떨어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반고로 전학 가고 싶어 했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우리는 심도 깊게 윈터스쿨 내내 나누었다. 그만큼 매일 찾아와 질의응답을 하고 얼굴을 마주했다.


수연이는 정애와 같은 반이었다. 공부도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전교 1등을 거의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때문에 학생부 전형과 내신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그녀의 뜻대로 우리나라 최고 대학 중 하나에 당당히 합격했다. 수연이는 특히 시크한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그 말이 특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여장부다운 이미지와 시원시원한 말 한마디, 그리고 때로는 날카로운 집중력과 예리한 질문으로 한 번씩 나를 당황케 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장난 삼아 "시크녀, 시크녀"라고 놀리다가 결국엔 울음을 터뜨린 여리고 여린 천상 소녀이기도 하다. (*미안했다아아아!) 물론, 나는 위기의 울음에 넘어가지 않고, 도중에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기적(?)을 행했고 위기를 모면했다. 후후. 정애는 졸업하고 나서 통화만 하고 만나진 못했다. 수연이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대학생 vs 대학생으로 술도 마시고 공연도 보고 노래방도 가는 등 즐거운 반창회를 함께 했다. 


가정방문에 앞서 바쁜 수험생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명분이 필요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대학생인 내가 가장 쉽게 만남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트릭이었다. 내 책임감과 양심에도 걸리는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명분으로 구멍을 메우는 보충수업으로 잡았다. 평소 아이들이 어려워했던 단원을 하나 고르게 하여 그 단원에 대한 특강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보충수업의 주제는 <무한수열과 극한의 참 거짓>이다. 행렬의 참 거짓처럼 합답형 문제이자 꾸준히 수능에 출제됐던 유형이다. 학교나 학원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정리를 잘해주지 않았다. 나도 유독 수학이 강세였던 모교 심화반 특강에서 처음 접하였고, 재수할 때가 되어서야 제대로 개념으로서 정리했던 특별한 주제였다. 그러니 갓 수 1 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예비 고2 학생들에게는 감 조차 잡히지 않는 내용이다.


멀리 부산 기장군까지 가게 되었다. 정애 어머님의 배려로 당신의 직장에 있는 세미나실을 사용하여 편하게 수업을 할 수 있었다. 기장군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되었지만 약간 도농통합 시와 같은 느낌이었다. 부산시내와는 꽤 떨어진 외곽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님 사무실도 꼬불꼬불한 길을 끝없이 들어가 초록이 우거진 산과 나무, 그리고 들판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했다. 어렵사리 도착해 내부로 들어가니 흑칠판과 분필 그리고 책상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여느 강의실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원칙대로 교재를 그날에 맞게 특별히 제작하여 특강을 준비해두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조금씩 다르게 매 번 교재를 준비하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힘들지 않았다. 즐거운 일이었으니 몰입이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1년이 넘는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요령도 생기기도 했다. 설령 이전에 같은 주제의 수업이 있었더라도 나는 하다 못해 그들만을 위해 교재의 양식이라도 바꾸었다. 나를 믿고 어렵게 참석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3시간 이상의 수업과 질의응답 그리고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까지 나누었으니 꽤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특별히 캠코더를 동원해 영상까지 촬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면 대박이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다. 하핫.


아침 일찍부터 만나 그 반가움도 잠시, 우리는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미 윈터스쿨을 통해서 공부의 자세가 더욱 견고하게 잡힌 아이들이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성장할 수가 있나 싶었다. 고민 많았던 정애의 모습이 훨씬 자신감에 차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여러 해법을 연구했었다. 수연이는 여전히 차가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본인의 페이스를 잘 유지하는 듯했다. 


수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정리해 간 극한 참 거짓의 개념들을 수십 가지의 유형별로 정리해주고 쉬운 예제를 함께 푼 후, 실제 고3 평가원 모의고사에 출제된 난이도 있는 문제들을 함께 다루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가정방문을 할 때마다 학부모님들께서는 큰 지지를 보내주셨다. 감사하다. 가정방문 자체가 부모님들의 허락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탓도 있지만, 윈터스쿨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우리가 보낸 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집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실천하고, 또 그 에피소드들을 부모님과 지속적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내 이름도 자주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다. 큰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세상은 이렇게 큰 기쁨으로 돌아오게끔 만들어 준 것 같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멘토링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오전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집중력 덕이다. 정애 어머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차에 태우시고는 부산 시내로 나가 맛있는 회를 사주셨다.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 한 횟집에 들어가 앉았다. 어머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사주셨다. 다시 생각해도 참 감사하다. 단지 한 명의 대학생일 뿐인데. 덕분에 땀 삐질 흘리며 맛있는 매운탕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돌아와 남은 수업과 질의응답을 마무리했다.


긴 장정이 끝나고 거의 하루가 지났다. 해가 산너머 주황빛을 띠며 서서히 기울어가는 때. 우리는 다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수연이도 다시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돌아갔다. 가정방문을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단순히 공부 한 글자 더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힘든 시기에 서로 의지하는 사람과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 인연들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이 날지 혹은 더 아름답게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이 내 20대 초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다들 참 보고 싶다. 이젠 18이었던 그들도 26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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