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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14. 2019

방과 후 서비스(3)

의지의 소녀 -하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화를 했다. 방학을 맞이해서 무엇이 궁금한지, 그리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여느 때처럼 질문도 던졌다. 6월 평가원을 기분 좋게 치르고 한 층 고무돼 있던 그녀였다. 의욕이 넘치면서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보면, 그들의 행동에 몇 가지 유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이 궁금한지, 어디까지는 자신이 생각을 해냈으나 무엇에 막혀 난관에 봉착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질문을 하는 유형이 첫 번째다. 질문의 가장 바람직한 예다. 누군가의 지혜를 빌려 해결해야 하지만, 궁금함에 대해 스스로 깊이 생각했기에 해결도 빠른 유형이다. 두 번째는 모르긴 모르지만 해결은 통째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무작정 "이거 어떻게 하나요? 저거 풀어주세요!"라고 달려드는 유형이다. 질문 자체를 꺼리진 않아 고무적이지만, 여전히 수동적인 학습에 의존하고 있는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으로 변화하는 길목에 있다. 마지막 하나는, 꺼림칙하고 답답해서 질문을 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심리적으로만 갑갑함을 느끼는 유형이다. 이러한 유형의 학생들은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고 계획서를 쓰는 훈련부터 시작할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남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과 자신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앞서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단계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내 그것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내가 파악한 학생들의 질문 유형은 크게 이렇게 세 가지였다. 물론 여기에 전혀 질문을 오지 않고 오로지 '독고다이'를 보여주는 학생들도 있다.  

 

학생이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첫 번째 유형의 모습을 가지고자 노력을 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작은 트릭이다. 어떠한 일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볼 것인지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 아닌가?

 

소녀 또한 처음에는 세 번째 유형의 학생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데 그 '무엇'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늘 심적인 답답함과 쫓긴다는 생각에 큰 스트레스를 안고 살았다. 수험생이 얻게 되는 가장 비효율적인 스트레스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그 실체를 알고 있더라도 선뜻 해결방안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인간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불확실성을 늘 가지고 있다. 결국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주기 위해서 가정방문을 내 멘토링 여정 처음으로 실천했다. 당시 나에겐 신선하고도 꽤나 적극적인 도전이기도 했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내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서울에 있는 내가 집안 행사가 아니면 특별히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그녀를 편하게 만나러 가기 위해 겸사겸사 고향에 내려갔다. 방문에 앞서 명분을 세웠다. 우리는 지금까지 밀린 수학 질문을 해결하고, 남은 수험생활의 계획을 세우며, 지금까지 해온 공부의 방향을 점검한다는 명분으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렇게 경남 진해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아침 일찍 진해로 출발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크게 놀라지 않으시고 흔쾌히 차량 협조까지 해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여행을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등록하고 길을 찾아 들어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아이의 집으로 향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진해 소녀와 상봉했다. 5개월 만에 만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바뀐 것도 없는 것 같고, 퇴소할 때의 그 느낌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 9시 30분 정도에 그녀의 집에 도착을 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약속한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수학 질문을 받기 위한 연습장, 참고하기 위한 개념 교재들, 그리고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의 옛 단권화 노트 등이다.  먼저 우리는 그녀의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녀의 방은 평범한 여고생의 방이었는데,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녀의 책상을 독서실 용 책상으로 교체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학습 분위기에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책상 여기저기에는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방을 슬쩍 둘러본 후 우리는 거실에 마주 앉았다.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우리는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재수생들의 수학 질문을 열심히 받고 있던 터라 이전보다 더욱 수학 실력이 견고해진 나였다. 문제풀이 갈증을 몹시 느끼고 있을 진해 소녀의 마음을 생각해 최대한 정확하고 신속하게 문제풀이를 했다. 학원에서는 질문 경쟁이 치열해 학생들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고 틈바구니를 파고들어가면서 질문을 해왔었는데, 이렇게 과외하듯이 집에서 여유 있게 문제를 푸니 여유가 있어 좋았다. 우리는 문제풀이를 하면서 필요한 개념도 하나씩 정리했다. 질문을 받으며 관찰을 해보니, 항상 학원에서 지적했던 그녀의 학습 자세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말 내게 혼이 많이 났던 부분인데, 이제는 더 이상 질문 중에 팔로 턱이나 얼굴을 받치고 있지도 않았다, 문제 풀이하는 내내 눈빛은 맑고 빛이 났으며, 그녀의 의지가 내 머릿속을 파고들 정도로 공부의 자세가 다듬어져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스스로 공부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3-4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거실에 앉아 문제풀이를 했다. 중간에 잠깐 쉴 때 이따금씩 잡담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드문드문 떠오르던 궁금증들을 나에게 물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일하시던 그녀의 어머님께서 들어오셨다. 점심식사를 차려주시기 위함이다. 어머님께서는 고깃집 식당을 운영하신다고 했다. 뚝딱뚝딱 음식이 차려지더니 어느새 상다리가 휠 정도로 풍성한 식탁이 완성되었다. 상위에는 갓 요리된 때깔 고운 고기들이 풍성하게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셨다. 들어가시는 길에 내게 다시 한번 당부를 하셨다. 당신께서 고깃집을 운영하시는 데도 딸아이가 밥을 먹지 않으니 꼭 아이가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이야기를 잘해달라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제를 함께 풀었고, 필요한 개념들을 짚어보았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 앞으로의 공부 방향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점검을 하기로 했다. 중간에 내가 수험생 때 만들었던 단권화 노트들을 하나의 예시로 보여줬다.

 

많은 학생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지만, 공부의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과론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신이 하지 않은 것,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을 본격적으로 공략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역린을 건드린다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학생들은 어떤 부분이 중요하고 또 어려운 것인지를 알면서도, 단순히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고 다른 부분에서 겉돌곤 한다. 물론, 남은 시간에 맞추어 본인이 가고자 하는 대학과 그 특수성에 집중해 때로는 어떤 과목에 더욱 집중하고 어떤 과목은 버려도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대입시스템에서 일반학과에 진학할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과목 우선순위만 달라질 뿐 버려야 할 것은 없었다. 정직하게 공부하고 수능으로 심판받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 해야 하니 어느 것부터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손을 봐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좋은 멘토링을 위해 멘토는 본인이 많은 경험을 하고, 성찰을 하며,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겪어야 한다. 스스로 노력해 발전하지 않으면 다양한 학생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학생들의 배경은 무궁무진하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주입식 상담으로는 전달과 공감의 과정에 한계가 있다. 학생들은 거창한 문장이 필요 없어도 몸으로 느낀다. 멘토와의 대화가 자신의 귀에 쏙쏙 박히고, 공감이 되는지를. 그 대화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학생들의 생활에 녹아드니 변화가 생길 단초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진해 소녀도 대화를 통해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멘토링도 하나의 설득의 과정이다. 설득을 통해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잔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나 공부 환경이었다. 많은 경우를 보았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기숙학원을 거친 고등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학원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만들어간 좋은 면학분위기를 학교에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공부하는 자신의 책을 장난 삼아 가져가 방해를 하는 주변 친구들도 있다. 쉬는 시간에 단 1분도 이용할 수 없는 교실의 분위기도 있다. 처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가 환경에 의해 좌절된다는 것을 느낀 아이들은 조급한 마음에 자퇴를 결심하고 상담을 요청한다. 이 케이스가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진해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고민을 받을 때마다 나의 일관된 의견은 'No'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도 중요하고 대학도 중요하지만, 인생에 단 한번뿐인 고등학교 생활, 그리고 그 졸업장의 가치는 나 또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해서 오는 후회보다 하지 않은 아쉬움을 더 큰 후회로 느끼는 것 같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으나 자신의 환경 때문에 대입 성적이 나쁠 수도 있다. 대입에는 재수가 있다. 힘든 여정이지만 명목상 기회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일생에서 고등학교 생활은 10대의 마지막 그때뿐이다. 나는 제 나이에 꼭 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10대에는 학교를 다니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고, 20대에는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며, 30대에는 가정을 꾸리거나, 지금껏 공부한 것을 직업을 통해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불만을 할 수 있는 자격은 그 상황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한 참 나누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단권화 노트에 대해 대화를 했다. 단권화 노트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로 작성을 했고, 어떤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창조되었는 지를. 흔히 단권화 노트는 공부 잘하는 학생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뻐엉'하고 터져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 그 과정에서는 수없이 많은 수정과 본인에게 편안한 방식을 찾은 흔적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공부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을 모은 것이 결국 단권화 노트이다. 본인이 편한 방식으로 작성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일정한 형식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다만, 단권화 노트를 만들고 효과를 보는 사람들의 과정과 결과를 많이 접해야 본인에게 동기가 생기고, 그 생성된 동기를 통해 본인에게 필요한 맞춤식 단권화 노트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만의 방식을 강요한 것이 아닌, 하나의 예, 샘플로서 그녀에게 소개해 보았다.

 

공부에 욕심이 오른 그녀였기에, 진해 소녀에게 단권화 노트들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 듯하다. 스스로 연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아 나는 선뜻 내 단권화 노트들을 과목별로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그렇게 8-9시간이 흘렀다. 몸도 슬슬 지쳤다. 내 멘토링 첫 가정방문이어서 그런지 많은 시간과 열의를 쏟았다. 보수는 딱히 없다.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었고, 나의 작은 지식과 경험이 학생에게 명쾌함을 주고 걱정을 덜 수 있게 했으면 된 것이다. 나는 떠나는 시간이 되어 마지막으로 진해 소녀에게 어머님께서 부탁하신 그 미션을 비로소 수행했다.



"까불지 말고 밥 챙겨 먹어라. 알았나?"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은 별개다. 성적이 잘 나오기 위해서는 시험을 잘 쳐야 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시험을 잘 치기 위한 준비도 수험생은 병행해야 한다. 체력을 유지하는 것, 좋은 것을 먹는 것, 좋은 생각을 하고 잠을 잘 자는 것들이 포함된다. 그 모든 것들을 수험생활을 통해서 학생들은 스스로 제어하고 도움받으며 보충해야 한다. 그 모든 노력과 요소들이  '실력'에 포함된다.

 

고맙게도 그녀는 정말 그날 이후로 밥을 잘 챙겨 먹었다. 가정방문은 그래서 성공적이었다. 그래도 참 대단하다. 밥을 먹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의지는 나 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경지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더 큰 가능성을 그 순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배우고 싶은 그런 경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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