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ygone Days - Porco Rosso, Youtube
(브런치 앱을 제외한 PC, 모바일 인터넷 앱으로 보시면 음악과 글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요)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결국 자기 방어를 위해 움직이는 지라, 좋은 기억은 기억하고 안 좋은 기억은 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벌써 4-5년의 시간이 흘렀다. (*2019년 현재 8년이 지났구나)
2010년의 일이다. 당시 예비 고3 문과 최상반의 수학 조교로서 일을 하고 있었다. 10명이 넘는 대학생 조교들이 각 반 별로 배정이 되었고, 50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5 주의 윈터스쿨 과정을 함께 보냈다. 중학교 졸업도 채 하지 않은 학생부터 재수를 위해 미리 들어온 예비 대학생들까지. 출신성분도 다양하고 사연도 다양했다.
조교들이 각 반에 소속이 되고 1주일 정도 지나면 보통 반 구성원들과 친해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다 보면 자기 반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그것은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조교가 짱이야! 아냐, 우리 조교가 짱이야!"
소속감이라는 것은 이렇듯 참 무섭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조교들은 자기 반을 위해 온갖 열의를 쏟게 된다.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다른 반 친구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졌다. 상대적으로 인원이 적은 여학생들은 더 많은 빈도로 다른 반 학생들과 친해지고 유대감을 쌓는 것 같았다. 기숙사 사정 상 타반 학생들과 룸메이트가 되기 때문이다.
각 잡힌 곳에서 빡빡한 하루를 보내는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휴식 시간이 있다. 새콤달콤한 그 시간은 기숙사 점호 전 30분이다. 나도 겪어보았지만 무슨 할 이야기가 그토록 많은지 다양한 이야기 꽃이 곳곳에서 피어나게 된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우리만의 시간이다.
학생이든 조교든 기숙학원에서 생활하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우리 반에 무슨 일이 있었다, 누가 뭐라고 했다 등 그날그날 이야기들을 공유한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주로 학생들 이야기"라는 마르고 닳도록 들은 말을 우리는 직접 체험했다. 항상 보고, 듣는 것이 아이들과 관련된 것뿐이니 자연스럽다. 조교들은 아이들과 나눈 상담의 주제 혹은 들은 내용을 공유하여 함께 해법을 찾거나, 서로의 의견을 자주 교환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자신이 조교와 나눈 이야기를 나누거나, 보통은 자기 반 조교와 다른 반 조교들을 비교하고 평가했다. 그 내용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조교는 원생들의 수험생활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한다. 수학이라는 과목에 한정해서 일을 하지만,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다 보면 다른 과목, 다른 고민들로 대화의 폭이 넓어졌다. 수학 질문 시간에 와서 언어영역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고, 답답한 마음에 고민을 털어놓거나 심지어는 진로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만큼, 조교란, 조용한 산 꼭대기 속의 유일한 해방구이자 탈출구였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이야기 꽃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겐 십여 명의 조교들 중 유독 친했던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1층에서 재수 선행반 학생들을 위해 일하기도 했고, 함께 윈터스쿨에서 일하기도 했다. 저마다 특출 난 저력이 있는 친구들이다. 수험생활의 경험이나 사연도 제 각각이며, 특기도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자기 반 학생들 챙겨주는 데에는 똑같이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공통점이 우리를 한 울타리로 묶어준 것 같다. 3명의 이과 조교와 3명의 문과 조교로 이루어진 우리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대부분의 주제가 결국 '공부 방법'으로 귀결되곤 했다.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것이 더 나을지 선택을 하지 못해서 오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모방의 롤모델을 찾기 위해 오기도 한다. 조교들은 대개 자기 반 아이들과의 이야기는 자기 선에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때때로 본인보다 다른 조교가 더 좋은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서로 자기 반 학생들을 이쪽저쪽으로 소개해주곤 했다. 이과 조교들은 언어영역에 대한 상담이 들어왔을 때 문과 조교들에게 한 번 가보라고 권하였고, 문과 조교들은 또 수학에 대한 이과만의 빠른 답변이나 혹은 각자의 화려한 수험생활 에피소드를 공유하기 위해 이과 조교에게 가보라고 권했다. 이렇게 우리 6명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학생들과의 대화에 임했다.
사실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사용할 시간도 부족할 판인데, 나는 종종 1층서 올라오는 재수생들이나, 이과 학생들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반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식사시간, 쉬는 시간, 혹은 심야 자습시간 등을 더 꺼내 써야만 했다. 물론 몸은 힘들어도, 찾아와 주는 고마움 덕분에 오히려 보람을 느꼈다.
한 재수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날은 시간이 넉넉했는지 이야기가 길어졌다. 우연히 나는 처음으로 조교로서 나에 대한 학생들의 평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때 비로소 학생들끼리 그 경험들, 예컨대 조교와 있었던 좋고 나쁜 모든 이야기들, 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나 신선하고 큰 충격이었다. 선행반에 있었던 유진이라는 학생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자상남 선생님, 그거 아세요? 여학생들끼리 네트워크 있는 거?"
"어? 뭔 네트워크?"
"일명 샤워실 네트워큰데요ㅋㅋ, (공용) 샤워실 가면 재수생이고, 윈터 1학년이고 온통 조교들 이야기밖에 안 해요."
"헐, 진짜?"
이렇게까지 학년을 망라해 에피소드들이 넓게 공유되는지는 몰랐다. 서로가 알지 못해도 넓은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며 서로가 서로를 엿듣기도 한다는 말이다. 어쩐지 어느 순간부터, 심지어 오며 가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나에게 불쑥 찾아오고 내 이름을 알고,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싶더라.
"근데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도 그때 듣고 찾아온 건데요. 선생님이 조교 중에 1 타래요, 1타 조교 등극 축하요 ㅋㅋ"
"아 진짜?ㅋㅋ 대박"
많은 조교들 중에서 우리 6명이 유독 평판이 좋았다는 후문이다. 어쩌면 이 공통점이 있어서 우리 모임이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상에 참 비밀 없더라. 샤워실 네트워크! 신선한 충격과 기분 좋음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날 이후 더 많은 열정을 불태우게 됐다. 진심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 없어도 전해지는 것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억지로 잘하려고 보여주기 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묵묵히 열심히 하고, 진심을 다해 그들의 입장에서 임하다 보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권위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사제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