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이슬란드 감기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은 비행기를 타고 오던 중에 나라가 없어져 출입국이 되지 않는 남자가 공항을 벗어날 수 없어 그 안에서 살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뭐 <터미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스키폴 공항에서 8시간 30분 동안 생활하게 됐다. 입/출국을 해서 시내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나 나의 귀차니즘을 고려했을 때 그냥 공항 구경이나 하고 잠이나 좀 자자 싶었다.
스키폴 공항은 꽤 크다. 각 게이트마다 시설들이 있어 전부 다 볼 수는 없었고, 내가 사용하는 게이트 주변을 중심으로 어슬렁거렸다. 면세점들을 짧게 구경했고, 식료품 가게나 서점을 둘러봤다. 특히 서점에서는 허슬러나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들을 래핑 없이 진열돼 있었다. 우리는 맥심 정도만 돼도 샘플이 없는데 역시 네덜란드다웠다. 허슬러를 몇 장 넘기다 슬퍼졌다. 중학교 때 우정의 상징이던 책이 인터넷의 발달로 뒷방 어르신 신세가 되다니. 기념으로 한 권 살까 하다가 20유로라는 가격에 슬그머니 내려놨다.
공항 편의 시절 중에선 바가 자주 보였다. 화려한 외관과 높은 등받이 의자가 인상적이다. 외국인의 체형에 맞춘 사이즈? 아님 프라이버시를 위한 디자인? 잘 모르겠다. 그리고 스키폴 공항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계다. 사람이 시계 안에서 시침과 분침을 계속 지우고 그리고 하는 모습을 한 전자시계인데 이 시계 하나로 “여기가 스키폴 공항이구나”하게 된다.
사람이 많은 허브 공항이다 보니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외국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의 배려다. 우리나라에서는 어깨빵이나 가방테러가 일상인데, 외국은 그렇지 않다(중국 제외). 부딪힐 것 같은 동선으로 오면 1~2미터 전에 이미 눈을 마주치고 “Excuse me”나 “I’m sorry”로 각자의 방향을 잡는다. 닿기도 전에 사과부터 하는 셈이다. 그리고 먼저 사과를 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왠지 지는 분위긴데. 외국과 우리를 비교하는 게 굉장히 촌스러운 관점인 건 알지만 이런 태도는 좀 부럽긴 하다.
어느덧 케플라비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됐다. 티켓팅을 하고 탑승 대기실로 와보니 90% 정도가 백인이다. 여기에 히스패닉 7%, 동양인 2%, 흑인 1% 정도다. 어딜 가도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관광객들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아이슬란드는 달랐다. 덕분에 백인 특유의 체취가 코를 찔렀다. 반대로 동양인이 많은 곳에서 백인들도 어떤 특정한 냄새를 맡았겠구나 싶었다.
아이슬란드 항공답게 비행기 천장이 오로라로 디자인됐다. 그리고 그 많은 백인들을 제치고 내 뒤에는 한국인 커플이 앉았다. 연신 사진을 찍고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대화하는 걸 듣고 알게 됐다.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았다. 3시간 비행이라 혹시 빵이라도 주려나 했는데 음료수 한 잔이 전부였다. 배가 고팠다. 물가가 비싼 아이슬란드로 가기 전에 네덜란드에서 뭐라도 실컷 먹어둘걸.
옆자리의 노부부는 간식을 많이 싸왔다. 그것들을 조금씩 먹으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항공은 이어폰을 따로 주지 않아 개인 이어폰을 사용하는데 나는 아이폰 잭이어서 모양이 맞지 않았다. 디스플레이 화질은 좋았지만 그저 책이나 볼 밖에. 시간이 좀 지나서 옆자리 할머니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난다. 근데 테이블에 물컵, 접시 등이 좀 많다. 난감해하길래 내 테이블에 옮겨줬더니 고마워한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간식 가방에서 귤을 꺼내 나눠줬다. 신맛이 강하게 나는 신선한 귤이었다. 가만있을 땐 안 주다가 뭔가를 하니 준다. 아름다운 기브 앤 테이크 문화다.
맛있는 귤과 함께 케플라비크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4시도 안 됐는데 벌써 어둑어둑하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기도 한다. 입국심사는 모두 자동화돼서 여권에 도장 따위 찍지 않고 스캔으로 끝낸다. 여권 도장을 모으는 나로서는 좀 아쉽다. 공항은 전반적으로 아담하다. 출국장은 다르겠지만 입국장은 마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정도 느낌? 입국심사하고 바로 밖으로 나오면 건물 앞이 주차장이다. 빨리 나와서 좋은데 공항을 제대로 못 봐 아쉽다.
공항 앞에 리무진 버스가 대기 중이다. QR코드가 박힌 바우처를 내밀고 차에 올랐다. 두근두근 여기가 아이슬란드구나. 두근두근 내가 진짜 레이캬비크에 왔구나. 두근두근 날씨가 좋아야 오로라를 볼 텐데. 하지만 4시 반이 되자 해가 졌고 버스 창 밖은 온통 깜깜. 두근두근보다는 이게 진짜 아이슬란드의 민낯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