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감기 #5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면 레이캬비크 리무진 터미널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큰 도시가 아니니 가는 길 역시 한적한 편이다. 비포장 산길을 가는 수준은 아니지만 멀리 황량한 얼음 벌판과 눈 덮인 바위산 정도가 보이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깜깜해서 잘 안 보인다. 뭔가 솟아 있으면 산이고, 평평하면 벌판이다.
시내로 들어오면 정비된 도로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0~15층 정도의 회사 건물들이 그나마 고층 건물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여기저기 공사를 많이 하고 있어 이곳의 모습도 달라질 것 같다. 리무진 터미널로 오면 각자의 숙소로 향하는 미니 버스로 갈아탄다. 리무진 예약할 때 최종 목적지를 적어놨기 때문에 그에 맞는 미니 버스를 타면 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목적지는 리무진 터미널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걸어도 갈 정도 거리. 하지만 추우니까 걷진 말자.
숙소는 레이캬비크의 랜드마크 할그림스키르캬('키르캬'가 교회라는 뜻이니 '할그림스키르캬 교회'는 잘못된 표현이다) 바로 앞이다. 레이캬비크를 보여주는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주상절리를 모티브로 한 교회가 바로 이름도 어려운 할그림스키르캬다. 5시 정도에 도착했는데 모든 사진이 다 야경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숙소에서 체크인을 했다. 아담한 방에 주방/화장실/욕실을 공용으로 쓰는 곳이지만 실내는 따뜻했다. 이렇게 추운데 오죽 잘 지었으랴. 대충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시내 구경 겸사 마트로 향했다. 살인적인 물가 덕분에 보너스마트 방문은 아이슬란드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다.
놀랍게도 마트가 문을 닫는 시간은 오후 6시.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도 퇴근 후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까. 시간을 알고 간 건 아닌데 다행히 6시 전에 장보기를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보너스마트는 금요일만 7시 30분이고 다른 날은 다 6시까지다. 보너스마트에서는 물과 우유, 요거트, 소시지, 과자 등을 샀다. 아이슬란드 환율은 우리의 10.8배(여행 당시). ISK 단위 가격표에 0을 하나 더 붙이면 얼추 비슷하다.
아이슬란드 시내의 집들은 지하 공간을 잘 활용했다.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높지 않고 반지하 공간도 있다. 아무래도 추운 날씨 때문일 텐데,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꼭 창문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 추위도 추위지만 햇빛을 받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심지어 반지하 공간들 역시 대부분 창이 있어 커튼을 치지 않으면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우연히 본 반지하 거실 공간에선 한 아저씨가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사온 것들을 풀었다. 우선 물. 아이슬란드는 지하수가 깨끗해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지만 왠지 찜찜한데다 들고 다닐 물통도 필요해서 샀는데, 그만 탄산수였다! 작게 스파클링 워터라고 써있는 걸 미쳐 못 봤다. 또 내가 고른 우유와 요플레는 점성이 강한 제품이었다. 우유는 건더기를 마시는 기분이었고 요플레는 반죽을 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해서 맛있었다. 소시지는 나중에 반찬으로 먹어볼 생각이다. 한국에서 라면이나 통조림, 김치 등을 싸오기는 했어도 현지조달 식료품이 필요하긴 하다.
저녁도 먹고 샤워까지 마치고 내일 일정도 확인하고 다 했는데 아직 8시 30분! 밖을 보면 영락없이 12시는 넘은 것 같은데 아직 초저녁! 할 일이 없어 산책을 했다. 8시 30분인데 거리는 텅텅 비었다. 할그림스키르캬 주변에서 사진 찍는 관광객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좀 걷다가 바람에 못 이겨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잘 잤더니 시차 적응도 끝나버려서 피곤하지도 않다. 심지어 내일 투어도 여유롭게 시작한다. 아, 심심한 나라여. 내 방엔 TV도 없단 말이다.
레이캬비크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작고 깔끔한 소도시.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오붓한 분위기도 있다. 할그림스키르캬 근처에 숙소가 있어서 그나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술집 밀집 지역은 밤에도 시끌벅적이었다. 역시 밤문화는 한 블록 뒤로 가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