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를 쏟고 튀어라

아이슬란드 감기 #3

by 김제르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인천 공항 창 밖으로 보이는 옅은 눈보라


3화 : 차를 쏟고 튀어라


밤 10시쯤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출발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았다. 사람이 많을까 봐 서둘렀는데 웬걸? 공항은 한적했다. 그 많던 패키저도 보이지 않았다. 유럽으로 가는 패키지가 밤에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KLM 네덜란드 항공은 발권부터 수화물까지 무인 시스템이다.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대기자도 없어 10분도 안 돼서 출발 준비를 마쳤다. 집에서 샤워까지 하고 나왔으니 이제 2시간 50분 동안 잘 빈둥대면 된다.


그 사이 조금씩 눈이 더 내려 제법 쌓였다. 흩날리듯 내리던 눈이 이내 소복이 쌓였다. 비행이 취소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출발이 원활하진 않겠구나 싶었다. 멍하게 앉아 있자니 한 무리의 중년 남자들이 온다. 나랑 같은 비행기를 타는 어르신들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의 티켓을 모바일로 확인하고, 정치, 경제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다 잠시 조용해져서 봤더니 격투기를 하고 있는 TV에 시선이 꽂혔다. 한 어르신이 가자고 하니 격투기를 좋아하는 다른 어르신은 엉거주춤 일어나며 최대한 가방을 천천히 메며 TV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보딩 게이트가 열렸다. 장거리 비행에 대비해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비행기에 올랐다. 창가에 앉았는데 옆 자리에는 커플이 앉았다. 피곤했는지 여자는 앉자마자 잠이 들었고 남자는 휴대폰만 본다. 조금씩 이동하는가 싶던 비행기가 활주로 어딘가에 멈춘다. 디아이싱을 하는 모양이다. 어디선가 커다란 장비 차가 와서 비행기 몸체와 날개에 제설액과 결빙방지제를 뿌린다. 고도가 올라가서 눈이 얼어 날개 작동이 잘 되지 않으면 낭패일 테니까. 0시 55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2시 5분이 돼서야 활주로에서 바퀴를 뗐다.


나란히 나란히


“드디어 가는구나” 무심하게 창 밖을 내다봤다. 하얀 액체가 얼룩을 만들었지만 쉽게 바람에 날렸다. 새벽 2시가 넘었으니 밖은 깜깜했다. 잠이 오지 않아 영화를 틀었다. 최민식 주연의 <특별시민>. 근데 디스플레이 화질이 엄청 구리다. 밤 장면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도 대충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잠들었다. 눈이 아파 빨리 감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앉아서도 잘 자는 편이다. 예전에 인천에서 잠들어 두바이에서 깬 적도 있다. 게다가 장거리 비행의 경우 출발 전에 충분히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편이어서 쉽게 잠이 든다. 이날 역시 그렇게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 발에 시원함이 느껴진다. 바지를 지나 슬리퍼와 양말을 적시는 아찔한 느낌에 깜짝 놀라 깼다. 앞에 앉은 사람이 마시던 차를 쏟은 것이었다.


스키폴 공항까지 타고 갈 KLM 네덜란드 항공기


“아, 차가워” 잠에서 깨자마자 약간 정신이 없었다. 앞에 앉은 한국 여자는 “어머, 어머”를 연발하더니 나를 힐끔 보고 어디론가 간다. 한국인 승무원에게 얘기를 하러 간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담요로 발을 대충 닦았다. ‘자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래’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뜨거운 차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어 승무원이 왔다. 내 상태를 묻더니 비즈니스석에 제공되는 서비스라며 양말과 안대 등이 들어있는 세트를 건넸다. “저희가 잘못한 일이 아니어서 이 정도밖에 해드릴 수 없습니다” 잉? 무슨 말인지? 누가 너님들 잘못이랬나? 아니면 뭐 이 사태를 해결하라고 했나? “그쪽 잘못이라고 한 적 없어요. 물을 쏟은 사람이 잘못이죠”라고 했더니 “앞에 앉았던 여자분은 의자가 젖어 자리를 옮기셨어요”라고 했다. 뭐지? 차를 쏟아놓고 승무원한테 얘기만 하고 튄 건가? 어이가 없었다. 차야 마르면 그만이라고 백 번 양보해도 “미안하다” 한 마디를 안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잘못 없는 승무원을 보내다니 KLM 관계자라도 되나 싶었다.


“승무원님 잘못 아니니 물 쏟으신 분한테 사과하라고 하세요”라고 말을 하지 못한 게 내내 분했다. 자리를 옮겨 버렸다는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제길!) ‘괘씸하군. 아주 괘씸해’ 속으로 분했지만 지나간 일이다. 그나마 신발이 아닌 슬리퍼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젖은 신발은 질색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도착


다시 잠이 오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다 신기한 모습을 봤다. 통로 쪽에 앉은 외국인은 중간이나 창가 쪽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면서 그 사람이 다시 올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 귀찮아서 일까? 모르겠지만 신기했다. 똥이라도 누러 가서 20분 있다가 오면 어쩌려고 싶은 안쓰러운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러다 다시 잠이 들었고 새벽 5시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의 암스테르담은 조용했고 도로에 차도 없었다. 드문드문 불빛이 보이다 화려한 주황색 불빛이 규칙적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비행기가 활주로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비행기가 멈추고 안전벨트 착용 신호가 꺼지자 사람들이 일어나 짐을 챙겼다. 늘 궁금한 건데 뒷자리에 앉은 승객들은 왜 나가지도 못하는데 짐을 들고 통로에 벌서듯 서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앞사람들 다 내리고 내릴 텐데 왜 서있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거라면 인정.


스키폴 공항에 내렸다. 아직 새벽이라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 최대의 허브 공항이라니 안에서 볼거리가 꽤 된다고 들었다. 한 선배는 “KLM 라운지를 꼭 이용해. 정말 좋아”라고 했지만 난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저 유리문을 통해 라운지 사람들이 편안히 쉬는 모습을 구경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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