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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르 Jan 27. 2018

장르적인 혁신을 이룩한
그래픽 노블 <왓치맨>

블루레이 리뷰 <왓치맨>


장르적인 혁신을 이룩한 그래픽 노블, <왓치맨>


앨런 무어가 창조한 <왓치맨>의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슈퍼히어로의 세계를 그려냈다. 슈퍼히어로들의 인간적인 삶을 시대 상황 속에서 표현한 이야기는 한 번 읽어서는 성이 안 찬다. 꼼꼼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2권짜리 단행본 그래픽 노블 <왓치맨>을 소개한다.


1987년 발표된 두 편의 그래픽 노블(그래픽 노블은 이미지를 통해 소설만큼의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단순히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코믹스에 비해 더욱 문학적인 소양이 깃들어 있는 장르다)은 그들의 영역 외에도 문학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그것. 훗날 다양한 형태의 슈퍼히어로 물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두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노령의 배트맨을 다루면서 슈퍼히어로의 또 다른 모습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왓치맨>과 비슷한 맥락이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활약에 비중을 둔 전통적인 스타일은 유지했다. 하지만 <왓치맨>의 경우는 전통적인 슈퍼히어로 물과는 동떨어진 작품이다. 1986년 연재를 시작해 이듬해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은 냉전과 핵전쟁, 환경 파괴와 우주 공학 등 당시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슈퍼히어로’보다는 ‘히어로’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다.


<왓치맨>은 1988년 팬 투표에 의해 수여되는, SF소설에서는 세계 최고 권위인 휴고 상을 수상한 최초의 그래픽 노블이었으며,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선정한 지난 25년간 가장 위대한 책 100권 중에 1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2005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발간된 100대 소설에 속한 유일한 그래픽 노블이기도 하다. 이런 객관적인 성과만으로는 <왓치맨>의 묵직한 세계관과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규정할 수 없는 선과 악의 개념, 개인 간의 갈등, 미스터리한 사건과 각 캐릭터들의 방대한 이야기가 단 두 권으로 출시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비범한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만들다 


어느 날,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슈퍼히어로 생활을 계속 하고 있던 코미디언이 건물에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경찰은 그가 슈퍼히어로라는 사실을 모르고 수사에 착수하지만, 같은 슈퍼히어로인 로어셰크는 그의 죽음이 ‘마스크 킬러’에 의한 살인이라고 의심하며 과거의 슈퍼히어로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경고한다. 1938년 미닛멘으로 처음 뭉쳤던 슈퍼히어로들은 매카시즘에 의해 활동을 멈추지만, 1966년 크라임 버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친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킨 법령이 시행되면서 모두 은퇴한다. 그런 와중에도 정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던 무지비한 코미디언과 핵물리학 실험 사고로 다시 태어난 닥터 맨해튼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슈퍼히어로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로어셰크는 킨 법령을 무시하고 계속 활동하며 쫓기는 신세가 된다.


모두가 은퇴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시기에 코미디언의 살인은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을 하던 닥터 맨해튼은 언론의 음모에 걸려들어 스스로 화성으로 떠났으며,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인 오지맨디아스는 암살의 위협을, 로어셰크는 덫에 걸려 감옥에 수감된다. 한편 닥터 맨해튼이 화성으로 떠나 홀로 남게 된 그의 연인 실크 스펙터Ⅱ는 나이트 아울Ⅱ의 집에 머물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나이트 아울Ⅱ는 최근 일어난 슈퍼히어로들의 사건에 뭔가 음모가 있음을 느끼고, 감옥에 갇힌 로어셰크를 꺼내 함께 비밀을 풀기 위해 오지맨디아스를 찾아간다. 하지만, 사건의 이면에는 그들도 미처 몰랐던 인류 전체에 대한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다.



<왓치맨>은 신개념 그래픽 노블로 장르적인 혁신을 이룩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12개의 챕터로 구성된 만화지만, 각 챕터의 마지막에 텍스트로 가득한 짧은 소설 형태의 글을 넣어서 이야기를 강화한다. 소설 부분을 읽지 않고 만화 부분만 읽는다면 각 캐릭터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으며 사건의 배경이나 과거의 사실 또한 알 수 없어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짧은 소설에서는 뉴스나 사건 파일이 나오기도 하고, <왓치맨> 속에서 홀리스 메이슨이 쓴 <후드 아래서>라는 책이 인용되면서 마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하지만 소설 분량은 단순히 이야기의 부연 설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슈퍼히어로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구체적인 설명을 넣은 이유는 <왓치맨>이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슈퍼히어로가 되었는가? 슈퍼히어로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은퇴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했고, 그들 내부에서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 등 삶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절대 선을 위해 활약하는 슈퍼히어로의 겉모습 외에도, 어떤 방식으로 부와 명성을 얻었는지, 그들의 가정사가 어떻게 파탄 났는지, 대를 이어야 하는 슈퍼히어로 2세의 운명이나 그들 안에서의 사랑(그들의 친분이라고는 같이 활동하는 슈퍼히어로들이 전부다)도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쇠락한 슈퍼히어로들의 삶을 소소하게 그려내는데, <왓치맨> 속 로어셰크의 말대로 ‘우리들 중 건강하고 성격 장애 없이 활동한 슈퍼히어로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독특한 구성, 남다른 세계관 


앨런 무어는 자신의 그래픽 노블이 영화화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러 영화화하기 어렵게 작품을 만드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 자체가 이미 영화적인 이미지와 상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왓치맨>은 우선 그 구성이 독특하다. 각 챕터는 어떤 사물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된 후, 다음 컷부터 점점 줌-아웃되면서 전체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리고 각 챕터의 처음에 나왔던 사물이나 장면은 반드시 그 챕터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이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책표지이기도 한 스마일 벳지는 챕터 1의 첫 그림인데, 마지막인 챕터 12 역시 스마일 벳지로 끝난다. 이미지의 수미상관인 셈이다. 그리고 9칸으로 구성한 한 페이지는 상황에 따라 칸이 붙으면서 위나 옆으로 이미지를 확장해 변화를 준다. 각 칸에 빽빽하게 들어찬 텍스트는 이야기의 전개는 물론 각종 상징과 은유, 캐릭터의 심리까지 반영한다.



텍스트뿐이 아니다. 이미지의 정보량도 상당하다. 특히 <왓치맨>에는 각설탕이나 키스하는 벽화, 자물쇠 수리공, 노스탤지어 향수 등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의 인서트처럼 쓰이는데, 한 칸에 표현된다는 점이 독특하다. 또 이렇게 잠깐 등장했던 사물이나 인물, 벽의 포스터, 뉴스, 낙서 등의 요소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어 나중에 이야기가 완성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가면 벗은 히어로의 모습을 도입부에 시침 뚝 떼고 등장시켜 뒷부분에 에피소드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영화적인 장면 전환이 많이 사용됐다. 줌 아웃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물론, 부감앵글(위에서 90도로 내려찍는)이나 시점샷(인물의 시점으로 그려지는)을 자주 활용했다. 특히 시점샷의 경우는 긴장감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시점을 통해 독자를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시키기도 한다. 또한 비슷한 앵글이나 사물을 통해 장면을 전환시키기도 한다. 장례식장에서 턱을 괴고 있는 닥터 맨해튼의 모습은 베트남의 한 술집에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면서 시간과 공간을 전환시킨다거나, 같은 사진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기도 한다.



또한 와이퍼 기법(새로운 이미지를 자동차 와이퍼와 같은 움직임으로 등장시켜 장면을 전환하는 기법)이나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면서 장면이 바뀌는 것도 인상적이다. 독특한 것은 반사를 통해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거울이나 유리와 같이 반사가 잘 되는 사물을 1인칭 시점으로 그려 칸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물체에 반사되어 등장한다던지, 바닥에 고인 물을 통해 인물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는 마치 슈퍼히어로들이 쓰는 복면과도 같다. 복면을 벗은 원래의 모습을 부정하는 그들의 특징을 반사라는 장치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또 다른 복면의 기능을 한다.


또 4번째 챕터에 등장하는 닥터 맨해튼의 과거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한 채 이미지와 내레이션을 나열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마치 영화의 몽타주를 보는 듯한 장면 구성은 현재와 미래, 과거와 대과거의 장면들을 무작위로 교차시키며 그때마다 시간 정보를 텍스트로 제공하는 복잡한 구성을 취한다. 시간을 완전히 해체하고, 이미지를 비선형적으로 나열한 후 새롭게 배치하는 놀라운 구성이다.


또한 <왓치맨>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교묘하게 비틀어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냉전과 우주시대, 언론의 음모와 베트남 전쟁 직후의 상황, 미국 정치 현실 등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삼았다. 닥터 맨해튼의 존재는 냉전시대의 미국에게 강력한 위상을 갖게 했다(닥터 맨해튼이 화성으로 떠나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세계 3차 대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온다). 베트남의 경우도 비틀어진 현실이다. 코미디언과 닥터 맨해튼을 통해서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를 통해 닉슨이 재선에 성공해 5대째 연임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이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38명의 방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참히 살해당한 키티 제노비스 사건, 남극 기지, 화성 개발 등은 <왓치맨>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왓치맨>의 상징과 은유, 영향력


<왓치맨> 속에는 ‘왓치맨’이 없다. ‘왓치맨’이란 표현도 슈퍼히어로를 상대로 한 시위 중에 누군가 벽에 쓴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에서 등장할 뿐이다. 결국 ‘감시자’가 모든 개념의 상위 개념으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한다면, 그런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과거 플라톤은 “노예와 상인을 보호하는 경비병은 그들 자신이 피보호층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 말로 인해 경비병은 스스로를 특별한 계층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누가 슈퍼히어로를 감시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슈퍼히어로로부터 보호해 줄 것인가?”에 대한 불안으로 폭동이 일어난다. 앨런 무어는 제목 그 자체에도 중의적인 표현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왓치맨’은 ‘감시자’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각 챕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류의 파멸 시간, 시계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나 분해와 재조립을 통해 세상을 재창조하는 닥터 맨해튼, 그리고 화성의 생성 시간, 현재를 만들어가는 과거의 시간 등은 시간을 통해 재구성되는 사건과 이미지의 <왓치맨>을 ‘시계(Watch)’와 관련해서 해석할 여지도 남겼다.



책의 표지이자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스마일 벳지도 마찬가지다. 코미디언의 트레이드마크인 스마일 벳지 위에 그어진 핏자국은 ‘지구 최후의 날 시계’의 분침을 상징한다. 분침이 12시를 가리키면 인류가 최후의 날을 맞는다는 이 시계는 1947년 멸망 7분 전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시간을 달리 해왔다. 특히 냉전 시대가 극에 달했을 때는 2분 전으로 조정됐고,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는 5분전이 되기도 했다. 이 ‘지구 최후의 날 시계’는 각 챕터의 마지막에 등장하고 이야기의 긴박함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마지막 12번째 챕터에서는 책의 표지에 있는 스마일 벳지의 핏자국처럼 거의 12시를 가리키고는 있다.


이 밖에도 <왓치맨>의 이야기 속 이야기인 <검은 수송선>도 꽤 비중 있게 그려진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엽기적인 일을 벌이지만, 막상 집에 도착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족을 죽이고 도망친다는 내용의 만화는 <왓치맨>과 표면적으로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검은 수송선>은 <왓치맨>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거나 인물의 감정이나 속내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포에 지배돼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은 <왓치맨>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들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외에도 각 챕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구도 인상적이다. 성경, 아인슈타인, 밥 딜런, 윌리엄 블레이크, 니체 등 종교, 과학, 문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의 말을 인용해 캐릭터나 이야기를 풍자하거나 은유하고 있다.



<왓치맨> 이후에 나온 슈퍼히어로를 다룬 작품들은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철학과 문학, 종교를 연결하는 다양한 해석을 시도한다. 슈퍼히어로로서의 삶에 심각한 고찰을 한다거나,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소외감을 표현하고, 개인적인 욕망과 절대적인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또한 슈퍼히어로가 상징하던 절대 선의 의미도 점차 퇴색해 가고 있다. 개개인의 존재보다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가치를 위해 희생하거나 순응해야 했던 그들을 통해 슈퍼히어로의 다른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왓치맨>은 상당히 입체적인 작품이다.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나 시대상을 반영하는 관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 그 속에 있는 암시와 은유 등 모든 것을 갖췄다. 여기에 영화적인 기법을 이해한 구성은 색다른 이미지까지 만들어냈다. <왓치맨>은 그래픽 노블의 한계를 넘어선 또 다른 종류의 그래픽 노블이다.


(사진 제공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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