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감기 #12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아이슬란드 버스 투어는 각자의 숙소 근처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투어 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그날의 투어 티켓을 끊는 것으로 시작된다. 각자가 신청한 투어에 맞게 입장권이나 버스 티켓을 끊고 투어 버스에 오른다. 나는 희한하게 한 남자에게만 계속 티켓팅을 하게 됐다. 줄을 서는 거라 지정할 수도 없는데 계속 같은 남자가 걸렸다. 이른 아침에 붉은 보드복을 입은 동양인 남자가 며칠 연속으로 자기한테 표를 끊으러 오니 그 남자도 나를 알아봤다. “미스터 킴, 맞죠?”라고 하고, 나 역시 “매일 아침 보네요”라며 웃는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질문에 “한국”이라고 했더니 갑자기 화색이 돈다. 자기는 한국 영화를 좋아한다고. 특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 영화는 심심하고 미국 영화는 전형적인데 김기덕 영화는 강렬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한 때 영화에 관한 일을 했고 김기덕 감독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하니 굉장히 반가워했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이 좋지 않은 스캔들에 연루돼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아이슬란드 청년의 환상을 깨주고 싶진 않았다.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그의 영화가 좀 자극적인 편이죠”라는 말로 마무리할 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긴 대화는 못 했지만 세상에나 아이슬란드까지 와서 한국영화를, 게다가 김기덕 감독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티켓팅을 하고 버스를 타러 갔더니 오늘은 좀 작은 버스가 배정됐다. 인원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미니 버스보다 조금 큰 정도의 버스여서 살짝 당황했다. 전날 만났던 콧소리 앵앵거리는 중국인 여자와 그의 남자 친구도 보인다. 그 외에도 의외로 동양인이 많이 보였다.
이날 투어는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를 중심으로 왕복 11시간이 걸리는 일정이다. 거리 자체가 멀지는 않지만 반도를 둘러보는 일정이라 중간에 멈추는 곳이 많았고 걸어서 보는 시간이 좀 있었다. 긴 일정인 탓에 8시라는 이른 시간에 출발했고, 버스 안은 다들 피곤해 보였다. 밖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좁은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어딘가 기대어 자거나 축 늘어진 모습이 마치 새벽 인력 시장 같은 느낌이었다.
신기하게도 아이슬란드에도 터널이 있었다. 항상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릴 줄 알았는데 산을 뚫고 길을 냈다니. 심지어 터널은 길고 커브도 많았다. 제주도에서 터널을 만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는 줄 알았더니 터널을 뚫었구나 싶은 생각에 뭔가 배신감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보여도 바깥이 낫지 터널은 뭔가 아이슬란드답지(?) 않았다.
버스 제일 앞자리에 앉은 싱가포르 남자애는 다리를 벌리고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다. 자다가 스팟에 도착하면 머리가 붕 뜬 채로 일어나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다시 들어와 잠을 잤다. 무슨 기계 같았다. 하지만 2번이나 늦게 돌아와서 버스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 한 마디 해줄까 하다가 그냥 참았다. 한 마디 하려고 하면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동하면서 자고 깨서 사진 찍고, 전형적인 사진 남기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박 지각 사건은 내가 일으켰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에서 나는 모두를 30분 넘게 기다리게 했다. 이날 버스는 해안선 끝자락에서 우리를 내려줬고 해안선을 따라 마을을 지나 반대쪽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깜빡 졸았던 나는 이 내용을 못 들었다. 멍청하게 해안선을 따라 마을까지 갔다가 간 길을 되돌아와서는 “어라? 버스가 왜 없지?”하고 혼자 당황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어지자 늦었구나 싶은 생각에 반대 방향으로 전력 질주를 해버린 거다. 헉헉거리며 “뭐지? 뭐지?”하며 어리숙하게 있을 때 반대쪽에서 기다리던 버스가 결국 날 찾아서 다시 이쪽으로 넘어왔다. 버스 문이 열리고 나는 모두에게 미안하다며 버스를 탔는데 버스 기사의 첫마디는 “영어를 못 알아들어요?!?!”였다.
그 싱가포르 남자애한테 “늦지 말라”고 한 마디를 했다면 얼마나 쪽팔릴 뻔했나.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을 거다. 이렇게 크게 늦을 놈이 겨우 5분 늦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할 뻔했으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영어를 못 알아듣냐”는 말도 비수로 꽂혔다. 영어를 잘 못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뭐라 변명하기도 애매했다. 나중에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깜빡 잠이 들어 얘기를 듣지 못 했다”고 영어가 형편없지는 않다고 소심한 항변을 해봤지만 그래 봐야 난 지각생일 뿐이지.
사실 “영어를 못 알아들어요?!?!”라던 가이드의 영어도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발음도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캘리포니아에서 온 관광객과 얘기를 하는데 캘리포니아 관광객이 가이드의 영어를 잘 못 알아먹어 몇 번이나 되묻는 모습을 봤다. 가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영어를 못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