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감기 #14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아이슬란드에 온 이후로 계속 어두운 레이캬비크만 봤기에 이날은 낮에 레이캬비크 시내를 둘러볼 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며칠간 일찍 일어난 습관 때문에 7시 조금 넘어 눈이 떠졌다. 다시 자려다가 조식이라도 먹자 싶어 식당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뭐지?"하고 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다들 별 거 아니라는 듯 여유롭다. 관광객들도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어둠 속의 아침 식사, 낯설지만 뭐 다들 재미있어하는 분위기니.
조식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조금 더 자기로 했다. 나름 여유로운 일정인데 늦잠 정도는 자줘야 덜 억울하지 않겠나. 눈을 조금 붙이고 일어났더니 9시 30분. 하지만 밖은 여전히 캄캄하다. 6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 외출 준비를 하고 시내 구경을 위해 숙소를 나선다. 오전 시간이다보니 관광객이 많이 다닌다. 대부분 노스페이스. 한국에서만 '등골 브레이커'로 인기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많은 관광객이 노스페이스를 입었다.
점점 해가 떠오르니 할그림스키르캬 주변이나 골목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고 또 찍는다. 하긴 저건 우리나라 관광객도 비슷하다. 한 100장 찍는 것 같더라. 그 중국인 여자 관광객은 서서 찍다가 앉아서 찍다가 쪼그려 앉아 찍다가 별의별 포즈를 다 취한다. 기다리다 포기하고 다른 곳을 둘러보다 와도 여전히 찍고 있다. 그냥 할그림스키르캬 내부로 향한다.
내부를 둘러보고 전망대에 오르려고 하는데 매표소에서 장애인이 일하고 있다. 비장애인 친구가 돈을 받으면 장애인 친구가 표를 주는 방식이다. 사실 그냥 돈 받고 표를 주면 그만인데 일부러 장애인 친구에게 역할을 주는 것 같았다. 장애인 친구가 표를 잘 주지 못해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표를 사는 사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고맙다고 말한다.
전망대 엘리베이터는 6명 630kg이 정원이다. 사실 여유가 좀 더 있지만 모두가 6명 정원을 칼 같이 지켰다. 심지어 일행 한 명이 못 탔지만 6명이 채워졌기 때문에 위에서 보자고 하고 엘리베이터를 보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이 장난을 친다. 나와 외국인 커플, 이렇게 셋이 비교적 붙어 있었는데, 여자가 “우리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라고 하자 남자가 “걱정 마. 오늘 양치질했어”라고 하며 웃는다.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던 나도 “저도 양치질했어요”라고 거든다. 다들 웃을 때 내가 “이틀 전에”라고 덧붙이니 엘리베이터 안이 빵 터진다.
전망대는 종탑이 있는 공간이다. 나름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라 할 만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레이캬비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가 예쁘고 멀리 보이는 항구와 그 너머의 설산도 멋지다. 11시쯤 되자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동쪽 주택가는 이내 해돋이로 물든다. 그러다 시간이 되니 종이 울린다. 멍하게 종탑 전망대에 있다가 갑자기 울린 종소리 때문에 <노트르담의 꼽추>의 콰지모도 될 뻔했다.
레이캬비크 시내의 주택들엔 벽화나 그라비티가 많다. 건물 전체는 물론 바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실력차는 좀 있다. 인상적인 그림도 있지만 애들 장난 같은 것도 있다.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지붕이나 건물 색도 다양하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들이 이어지니 시내 전체가 다채롭다. 또 개발이 한창이라 공사하는 곳도 많다. 곧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레이캬비크의 민낯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부동산이나 좀 알아봐야 하나? 근데 여기 물가 비싸지.
점심은 <꽃보다 청춘>에서 '핫도그 월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 핫도그 가게에서 해결했다. 언제 가도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정확한 위치보다 근처까지 가서 줄 선 사람들을 찾아야지 했는데 막상 가보니 줄이 없었다. 동양인 여자 관광객 한 명만 있을 뿐. 핫도그와 스프라이트를 구입했는데 매장 앞에 야외 테이블이 있다. 이 추운데 야외에서 먹나 싶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야외 테이블에서 먹더라. 생각해보니 공원 벤치 같은 곳에서도 그냥 앉아서 책 보는 사람도 많았던듯?
이 추운 날 할그림스키르캬 앞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이 있다. 보기에도 얇아 보이는 옷이라 안쓰럽다. 하지만 이들에겐 겨울의 일상이겠지? 이번 겨울 서울도 엄청나게 추웠지만 또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니까. 그나저나 아이슬란드 추위 경험했다고 으스댈라고 했더니 서울도 못지않게 추워서 할 말이 없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