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보러 영국갔다 #02
축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리버풀을요. 스티브 맥마나만 선수 때문에 리버풀을 알고 좋아하게 됐으니 족히 20년은 넘었네요. 박지성이 맨유에 갔어도, 손흥민이 토트넘에 갔어도, 리버풀과 붙는 맨유나 토트넘은 그저 적일 뿐이죠. 하지만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팬심은 어쩔 수 없지만 축구는 최고의 흥분과 감동을 주니까요.
비행기는 에티하드 항공으로 끊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아부다비를 거쳐 맨체스터로 들어가는 왕복권이다. 시간은 0시 15분. 또 새벽 비행기다. 몇 번 유럽을 가면서 느낀 건 중동 비행기가 편하다는 거. 오히려 국적기보다 더 넓고 전자기기들도 최신식이다. 물론 직항으로 가는 국적기를 안 타봐서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장거리는 중동이 최고다. 자정 비행기라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마치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마지막 리무진을 타도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진 몰랐다.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 에피소드가 날 기다릴 줄은.
내가 리무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6분. 막차는 8시 39분이다. 하지만 40분이 넘어도 43분이 넘어도 차는 오지 않는다. 다급하게 전화를 했더니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와서 그대로 가버렸다는 것. 화가 나서 버스회사랑 싸우니 기사랑 싸우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다시 기사와 2라운드. 기사는 아직 많이 가지 않았다며 3정거장 앞으로 오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리무진을 따라잡았다.
리무진에 오르니 왠지 내가 늦어서 리무진을 붙잡아 둔 것처럼 보였다. 괜히 기사한테 한 소리 하며 내가 늦은 게 아님을 사람들한테 어필했다. 머쓱한 분위기에서 버스는 출발했고 나도 막차를 탔다는 안도감에 곧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차비를 깜빡하고 말았다. 내리기 직전에야 차비를 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아차 싶어 차비를 내려고 하니 기사님이 괜찮다고 했다. 자기가 빨리 지나가서 괜히 택시까지 타게 했다고 그냥 가라고 했다. 이런 반전을 선사하시면 전화로 뭐라고 한 게 너무 미안하잖아요.
리무진 에피소드를 지나 티켓팅을 하러 갔다. 가면서 가방에서 뭘 꺼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번호키가 고장 났다. 설정해둔 비밀 번호가 자기 멋대로 바뀌어 버린 거다. 당황하지 않고 계속 숫자를 조합했다. 원래 번호랑 비슷한 숫자 조합으로 조금씩 맞췄더니 15분 조금 넘겨서 가방이 열렸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뜻밖에 새로운 비밀번호가 생겨버렸다. 낯선 번호지만 일단 외워야 다시 가방을 열 수 있으리라.
비밀번호 에피소드를 지나 티켓팅을 하러 갔더니 줄이 대박이다. KLM을 타고 아이슬란드에 갈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이 시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가만 보니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가는 사람들이 다수다. 사람 수도 많지만 짐이 한가득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이 그대로다.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방송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 ‘어랏 짐도 안 부쳤는데 뭐지?’ 줄을 이탈해 데스크로 갔더니 기다리란다. 한 10분 정도 기다리니 사람이 나와서 동명이인이란다. 장난 하나!? 다시 대열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줄은 길다. 1시간 20분 만에 짐을 부쳤다. 마음이 급해졌다.
티켓팅 에피소드를 지나 로밍 에피소드다. 블로그에서 찾은 대로 통신사 부스를 찾았지만 오후 10시까지란다. 제길. 후다닥 24시간 운영하는 곳을 찾아보니 두 층이나 내려가서 꽤 걸어야 했다. 이럴 때는 인천공항이 참 넓기도 하다. 급하게 후다닥 로밍을 마치고 탑승장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정신이 없는 건지 마음이 급한 건지 2번이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완전 바보 된 기분이다.
로밍 에피소드를 지나 탑승장을 통과해 시간 맞춰 게이트에 도착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달리 할 건 없었지만 시간에 쫓기니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비행기에 탔다. 내 뒤엔 3명의 아주머니 패키저가 앉았다. 그중 한 분이 앉자마자 헤드셋이랑 담요를 챙기다가 가이드한테 한 소리 듣는다. 괜히 화면에 나오는 꼬부랑글씨가 이상하다며 다른 소리를 하다가 곧 정치 얘기를 한다. 확연한 경상도 사투리였음에도 주된 내용은 홍준표에 대한 욕이었다. 심한 표현이 많이 나와서 적진 않겠다.
아부다비에서 환승했다. 티켓에는 33번 게이트라고 적혀 있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천천히 33번 게이트로 왔는데 분위기가 좀 쎄하다. 전광판을 확인하니 게이트가 33번에서 51번으로 바뀌었다! 전광판 안 보고 티켓만 보고 있다가 큰일 날 뻔했다. 후다닥 다시 51번 게이트로 질주. 다행히 늦지 않게 맨체스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들 변경 게이트 잘 확인하자. 티켓만 믿다간 낭패 보기 쉽다.
맨체스터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곳엔 백인과 아랍인이 대부분이다. 런던이라면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좀 있었을까? 여기 주변엔 키 크고 따분해 보이는 ‘너드’ 스타일만 가득하다. 낯선 곳에 혼자 있으니 이제야 한국을 떠났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