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보러 영국갔다 #04
축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리버풀을요. 스티브 맥마나만 선수 때문에 리버풀을 알고 좋아하게 됐으니 족히 20년은 넘었네요. 박지성이 맨유에 갔어도, 손흥민이 토트넘에 갔어도, 리버풀과 붙는 맨유나 토트넘은 그저 적일 뿐이죠. 하지만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팬심은 어쩔 수 없지만 축구는 최고의 흥분과 감동을 주니까요.
티켓을 들고 조금 이른 시간에 허더즈필드의 홈구장인 존 스미스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낮에 잠깐 갔다 온 탓에 길은 익숙했다. 숙소에서 살짝 애매한 거리였지만 버스도 딱 맞게 가는 게 없으니 그냥 걷자 싶었다. 현지 시각으로 8시 경기여서 좀 빨리 갔음에도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하루 종일 굶은 탓에 경기장 인근의 푸드트럭에서 샌드위치부터 사 먹었다. 정말 샌드위치 빵에 소시지와 양파를 넣고 소스만 뿌려주는 게 전분데, 크기가 커서 이름은 ‘점보 버거’. 일단 허기는 달랬다.
경기장 근처를 걷다 먼저 와 있던 리버풀 선수단 버스를 발견했다. 야호! 버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겠지? 그래도 뭐 상큼 발랄하게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줬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홈팀 서포터스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한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북부 사투리였지만 뉘앙스만 들어도 뭔가 놀리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일부러 경기장 가는 동안 목도리도 가방에 넣고 최대한 정체를 숨겼는데 버스 앞에서 모든 게 밝혀졌다. 팬심은 어쩔 수 없다.
다른 경기장에 비해 경비는 덜 삼엄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방 검사와 소지품 검사 정도는 하고 입장했다. 편의 시설이 많지 않은 경기장이라 검사하고 바로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원정 서포터스 자리는 골대 뒷자리의 절반이 좀 안 되는 규모다. 전체 좌석의 10%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나마도 전광판과 광고판이 위에 붙어 있는 가장 열악한 장소다. 그중에서도 내 자리는 제일 위쪽이면서 심지어 홈팀 응원단과 나란히 붙은 곳이다. 나름대로 위험한(?) 자리지만 그 사이에 경찰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쳐준다. 유리로 된 펜스도 있어서 실제로 접촉하기는 힘든 구조다. 홈팀과 붙어있다는 것보다 그라운드가 멀어서 아쉬웠다. 경기는 잘 보이는데 열기가 전해지진 않는다. 경기를 잘 보려고 했으면 그냥 TV로 봤겠지.
그래도 일찍 왔으니 경기장 아래로 내려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몸 푸는 선수들을 봤다. 골대 쪽이라 카리우스, 미뇰렛이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신기하다. 조금 먼 거리에서는 살라, 마네, 핸더슨, 채임벌린, 밀너 등이 공을 주고받으며 몸을 푼다. 이런 게 직관의 맛이 아니겠는가. 선수들 연습 장면은 물론 살라의 PK 골도 직접 봤으니 말이다. 특히 살라의 PK 골은 휴대폰 영상으로 담았다. 만약 앞자리였으면 흥분하느라 촬영은 못했겠지?
경기 시작 전부터 분위기는 뜨겁다. 허더즈필드 타운 인구의 약 5%가 이날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만큼 홈팀의 응원도 쩌렁쩌렁하다. 특히 원정팬 옆자리의 홈팬들은 가장 강성이다.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 응원가를 큰 소리로 불러댄다. 앞자리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이끈다. 응원으로 원정팬 기를 죽이러 온 게 분명하다. 이들은 경기 시작 전에도, 경기가 시작해도, 자기들이 골을 먹어도, 하프 타임에 선수들이 들어가도, 경기가 끝나도 초지일관 우렁찬 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른다. 원정팬들의 응원 소리를 덮고도 남는다. 정말 멋진 팬들이다.
물론 양팀 팬들이 가까이 있다 보니 심심찮게 설전이 오간다. 원정팀인 리버풀이 골을 넣고 앞서가니 열을 받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물론 리버풀 원정팬들도 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가 이기고 있네?” 하는 식으로 빈정거린다. 근데 이 설전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누구나 설전을 벌인다. 라이벌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홈팀을 사랑하는 마음과 홈경기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들 정말 축구를 좋아한다.
처음에는 리버풀 원정팬들이 주눅이 들어 소극적으로 나왔지만 점수를 앞서 가니 여유가 생겼다. 홈팀의 응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말싸움을 걸어와도 웃으며 받아줬다. 3번째 골이 들어간 이후에는 장난치듯 허더즈필드의 응원가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경기 막판 리버풀 팬들이 리버풀의 상징과도 같은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부르자 허더즈필드 홈팬들이 야유를 한다. 경기도 졌는데 상대팀 응원가까지 들어야 한다면 진짜 짜증 났을 거다.
경기장은 꽉 찼다. 3층 꼭대기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리버풀이 3-0으로 이겼지만 대부분의 팬들이 끝까지 경기장을 지켰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경찰들이 원정팬들을 엄호해서 경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남은 홈팬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기장을 나오니 경찰들이 쫙 깔려 있다. 기마경찰도 보인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시내까지 나왔다.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경찰차들이 요란하게 지나가서 뭔가 봤더니 원정팬들의 버스를 앞뒤로 에스코트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선 축구가 이렇게 큰 행사구나 싶었다.
영국 경기장들은 홈팬들을 위한 곳이다. 그래서 원정 티켓은 아주 조금 판다. 심한 곳은 원정 티켓 현장 판매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단다. 차라리 좌석을 비우더라도 원정팀의 응원을 막겠다는 것. 돈 받고 파는 건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경기장 열기를 보면 이 사람들한테 축구는 장난이 아니다. 끝장난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