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스널 홈구장, 그리고 에버턴 원정팬

축구보러 영국갔다 #08

by 김제르
축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리버풀을요. 스티브 맥마나만 선수 때문에 리버풀을 알고 좋아하게 됐으니 족히 20년은 넘었네요. 박지성이 맨유에 갔어도, 손흥민이 토트넘에 갔어도, 리버풀과 붙는 맨유나 토트넘은 그저 적일 뿐이죠. 하지만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팬심은 어쩔 수 없지만 축구는 최고의 흥분과 감동을 주니까요.


아스널의 홈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08 아스널 홈구장, 그리고 에버턴 원정팬


리버풀에 머물면서 멀리 이동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욕심이 생겼다. 영국까지 왔으니 첼시나 토트넘, 아스널의 경기장도 봐야 하지 않나? 리버풀에서 런던이면, 급행 타고 서울-대전 정도니 무리도 아니었다. 검색해보니 표는 있었다. 심지어 주말이라 가격도 쌌다. 또 예매 안 하면 가격이 오를 테니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예매했다. 마침 그날은 아스널과 에버턴의 경기가 있는 날이니 아스널의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경기 당일의 홈구장 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이른 시간에 나와 리버풀 라임 스트리트 역에서 버진 트레인을 타다


막상 출발하려니 비가 뚝뚝 떨어진다. 표를 미리 끊어놨으니 가기 싫어도 가야 할 판이지만 날씨를 검색해보니 런던은 오후에 비가 더 온단다. 제길. 투덜거리면서도 버진 트레인에 몸을 실었다. 런던에 도착하니 역시나 비가 오고 있었다. 후드를 덮어쓸 정도가 아니고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반바지에 반팔로 이어폰 끼고 조깅하는 사람이 보인다. 런던 애들은 원래 이런가? 반면 롱패딩도 보인다. 외국에서 만나는 롱패딩은 90%가 한국인이다. 나머지 10%는 중국인 정도. 여하튼 비가 오니 유스턴 역을 중심으로 시내나 기웃거리자 싶었다.


런던 도착 후 여기 저기 기웃기웃


비 오는 런던 거리를 운치 있게 걷다가 아스널의 홈구장으로 향했다. 이날 경기가 현지 시각으로 6시 30분이니 그전에 도착해 분위기 좀 보자 싶었다. 비가 여전히 많이 내려 귀찮기는 했지만 마음은 들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타야 하는 지하철 노선이 공사 중이었다. 다른 생각 없이 지하철로만 다니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버스를 타야 했다. 심지어 노선도 모르는데. 급하게 구글맵과 시티맵퍼부터 켰다.


아스널 홈구장으로 가는 길, 이미 팬들로 인산인해


주택가를 지나 아스널의 홈구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스널 역이 있었지만 내가 타려는 노선과는 달라서 소용이 없었다. 주택가에 접어들 때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하더니 아스널 역을 지나니 아스널 팬들이 떼로 모여든다. 자연스럽게 그들에 휩쓸려 경기장까지 도착했다. 길에서 계단을 올라 연결된 다리를 통해 경기장으로 가는 구조인데, 반대쪽 도로에서 보면 좀 넓게 트인 모습인데 내가 가는 방향에선 계단과 다리만 보였다. 계단부터 경찰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티켓도 없는 주제에 당당하게 소지품 검사를 당해줬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의 여러 모습들


그렇게 경기장 근처에서 분위기를 맛봤다. 아스널 팬들도 충성도가 높아 비가 오는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열기를 불태웠다. 입구가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에버턴 팬들은 보이지 않았다. 경기장은 커다란 선수들 사진과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이라는 글자로 4면이 도배돼 있었다. 신축 경기장이 아니니 전통적인 모습이었고 겉에서 보기에는 좀 심심한 구조지만 통유리는 세련돼 보이기도 했다.


경기장으로 몰려드는 아스널 홈 팬들


다시 소지품 검색 구간을 지나 아스널 클럽 샵으로 왔다. 지인의 부탁으로 베르캄프 유니폼을 사기 위해서다. 경기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국인도 많았다. 저지를 고르고 베르캄프의 이름과 등번호를 말하고 프린트를 기다린다. 근데 여기 사람들 참 여유롭다. 경기 시작이 임박해 손님들은 초조해하는데도 직원들은 느긋하다. 프린트할 글자 하나하나 확인받고 위치까지 체크한다. 근데 나도 문제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다 됐는데 이 사람들 빨리 할 생각을 안 한다. 지하철도 공사 중이니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시티맵퍼로 미리 알아보려고 했더니 갑자기 인터넷도 안 된다. 오 마이 갓!


이미 해가 진 시각, 마음이 급하다 어서 역으로 고고!


발을 동동 구르다 베르캄프의 저지를 손에 넣자마자 튀어나왔다. 경기장을 좀 벗어나니 인터넷이 된다. 휴, 다행. 문제는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하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배가 고팠지만 저녁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다. 빠른 걸음으로 주택가를 지나 버스를 타고 유스턴 역에서 내려 다시 종종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했다. 빨리 온 덕분에 시간이 좀 남았다. 10분 정도? 배가 너무 고파 샌드위치를 사서 들고 먹었다. 기차 타기 전에 먹으려고 급하게 꾸역꾸역 먹었다.


명절 티켓 대란을 연상케하는 유스턴 역 연착 사태


근데, 큰 문제가 생겼다. 기차가 연착된 것이다. 처음엔 그냥 연착이 되나 보다 했는데 시간이 자꾸 늘어난다. 다른 열차 중에는 아예 ‘취소’가 뜨기도 한다. 설마 취소되는 건 아니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1시간이 지났지만 일단 계속 연착이다. 관계자인 듯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들도 모른다고 전광판을 잘 보라고만 한다. 걱정이 밀려온다. 그 와중에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전광판에서 사라졌다. 대신 새로운 열차가 생겼다. 설마 저걸로 대체된 건가? 물어볼 곳이 없다. 시간이 늦어 역의 서비스 시설들도 문을 닫았다. 믿을 건 전광판뿐. 명절의 서울역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이 빠져라 전광판만 쳐다보고 있다.


그 와중에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전광판에 다시 등장했고 8번 플랫폼으로 가라고 나온다. 급한 마음에 냅다 8번으로 뛰었다. 근데 아무도 없다. 열차는 있다. 근데 행선지가 다르다. 맞나?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내 뒤를 따라온 사람들도 우왕좌왕하고 있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전광판 앞으로 뛴다.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다시 사라졌다. 이제부턴 눈치 싸움이다. 아까 내 뒤를 따라온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 분명 나랑 같은 심정이겠지. 그때, 새로운 열차가 전광판에 떴다. 행선지는 맞지만 열차 번호는 다르다. 사람들이 우르르 이동한다. 일단 같이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온다. 사람들에 휩쓸려 열차로 향했고 일단 행선지가 맞으니 타고 본다. 마침 역무원이 있길래 열차가 대체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오예. 2시간을 넘게 기다려 겨우 열차에 올랐다.


5-1로 져도 기세 등등한 에버턴 팬들


하지만 이 열차는 심상찮은 열차였다. 내가 탄 칸은 에버턴 원정팬들이 잔뜩 타 있었다. 이들은 플랫폼에서부터 응원가를 불러댔고 기차에 올라서도 기차를 두드리며 응원가를 이어갔다. 경찰 4명이 함께 타서 2명씩 앞뒤의 문을 지키고 있다. 함성 소리가 지나치면 다가와서 경고를 준다. 하지만 경찰을 보낸 뒤 1~2분이 지나면 다시 떼창이 시작된다. 5-1로 졌는데 응원할 힘은 나나 싶었지만, 그러니까 팬이겠지. 그 와중에 혼자 탄 여자는 잠을 청한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늦은 시간 리버풀로 컴백


특히 이들의 리더 격인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계속 경기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동작도 크고 목소리도 크다. 팔에는 에버턴의 문신도 가득하다. 그러던 와중에 그 아저씨 부인한테 전화가 왔다.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 전화를 받는 아저씨. 하지만 곧 주변 사람들이 일부러 더 크게 응원가를 부르고 아저씨는 사람들을 피해 자리를 옮기며 스피커폰으로 전환한다. 내용을 들어보니 부인이 자기 전화를 왜 안 받았냐고 따지는 것. 응원가를 열창하던 근육질 에버턴 팬은 아내의 잔소리에 순한 양이 돼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그렇게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다행인 게 이곳엔 24시간 영업이 좀 있다. 유스턴 역에서 허겁지겁 먹은 샌드위치로는 부족해 햄버거와 마실 것들을 좀 샀다. 걸어오는 길에도 영업 중인 술집이 꽤 있다. 역시나 안에서는 술병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흥겹고 정겨운 리버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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