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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르 Apr 16. 2018

<몬태나>, 그것은 진짜 화해였을까?

브런치 무비패스 #05


<몬태나>, 그것은 진짜 화해였을까?


친구와 동료 등을 인디언에게 잃은 조셉 대위(크리스찬 베일)는 암으로 죽어가는 인디언 추장(웨스 스투디)을 고향 땅으로 호송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10,000마일의 여정 속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진다. 가족이 몰살당한 로잘리(로자먼드 파이크)가 합류하고, 다른 부족의 기습으로 동료들을 잃기도 한다. 모피 사냥꾼들에 의해 여자들이 겁탈당하자 복수를 하고, 자살로 친구를 잃고, 탈영병이자 살인범인 부하의 난동으로 또 동료를 잃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몬태나에서는 그곳이 자기 땅임을 주장하는 약탈자 백인들에 맞서게 된다.


영화 <몬태나>의 원제는 ‘Hostiles’로 ‘적대적인’이라는 의미다. 영화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이런 적대적인 상황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용서를 비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의문점이 생기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했을까?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했을까? 이것이 진짜 화해이고 치유일까? 어쩌면 주어진 상황에서의 최선이나 그렇게 해야만 했던 정황들에 떠밀린 것은 아닐까?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에게 ‘진짜 치유’란 어떤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떠돌던 의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영화는 미국의 주인, 정확히는 미국 영토의 원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첫 장면은 백인 가족이 인디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인디언은 아이들까지 죽이고 집을 불태울 만큼 잔혹한 면모를 보인다. 영화 도입부터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미국이라는 큰 땅덩이의 원래 주인은 인디언이었다. 이주한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거나 죽이면서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잡아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냐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백인이 인디언을 죽이고 인디언이 백인을 죽이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조셉 대위의 분노에 더 동참하게끔 먼저 백인 가족의 죽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동료와 친구를 죽인 인디언 추장을 호송하라는 임무가 조셉 대위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관객은 더 크게 공감한다.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추장을, 암에 걸려 죽어간다는 이유로 ‘안전하게’ 그의 고향으로 호송을 하라니! 조셉 대위는 갈등하지만 명령으로 조직을 이끌어가는 군대라는 특수성, 또한 연금이라는 직접적인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무를 맡게 된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대원들의 면면이 독특하다. 조셉 대위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의 친구,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흑인, 프랑스 이민자, 백인 노동자 계급, 여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있다. 마치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런 미국의 축소판이 미국 땅의 원주인인 인디언을 호송한다는 설정으로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 길이 순탄치는 않다. 그저 용서를 구한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예상치 못한 외부의 적들로 인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조셉 대위는 호송이 시작되자마자 명령에 불복종하며 추장 가족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후에는 다른 인디언의 습격에서 대원을 잃자 그와 협력하게 된다. 그리고 추장의 여자 가족들이 백인 모피 사냥꾼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는 같이 복수를 하기도 한다. 또 중간에 떠맡게 된 인디언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탈영병이자 범죄자로 하여금 추장을 지키기도 한다. 급기야 영화의 마지막에는 추장의 땅을 불법 점거한 백인들을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자신의 동료와 친구들의 복수를 위해 인디언을 학살했던 조셉 대위가 추장을 지켜주고 함께 힘을 합치는 과정을 화해나 치유라고 보긴 어렵다. 불명예 제대로 연금을 못 받을까 봐 임무를 맡았고, 다른 인디언 부족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쳤고, 추장을 그들의 땅에 묻히게 하려고 백인들까지 죽였다.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친구가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한 것과 달리 조셉 대위는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행동했고 자신의 생존에 직결되는 판단을 했다. 다른 누군가를 분노의 대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진심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몇 가지,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친구와 동료에 대한 복수로 인디언들을 수도 없이 죽였던 그는 땅을 지키고 부족을 지키기 위해 백인들을 죽인 추장과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추장의 가족과 조셉의 여자 일행을 겁탈한 모피 사냥꾼을 죽이는 장면에서 그렇다. 그리고 인디언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친 그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침략자로서의 백인을 응징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심적인 고뇌와 행동하는 신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새로운 가족, 그것도 인디언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미래를 만들어주려는 그의 행동은 말로 하는 용서와 얄팍한 이해와는 차원이 다른, 인생을 건 참회이자 영혼을 뒤흔드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그가 내 주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극악무도한 인물이라도 가능할까? 비록 <몬태나>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본 희생자와의 이해와 교감을 다루고 있지만, 희생자의 후손들을 책임지겠다는 큰 행동으로 '가해자 시각'이라는 거부감을 없앴다. 미국 땅의 원주인인 그들이 계속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 화해이고 그 미래를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 치유이기 때문이다.


<몬태나> 속 배우들의 연기는 각자의 역할을 충분하게 해낸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편집의 속도가 느리고 과정을 다 보여주면서 러닝 타임을 늘리는 경향도 있지만,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인물을 설명하고, 상황을 이해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공감하게 한다. 과도한 편집이 감정의 흐름을 끊어먹지 않아 좋았다.


(사진 제공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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