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리버풀과 토트넘의 논란의 경기

축구보러 영국갔다 #11

by 김제르
축구를 좋아합니다. 특히 리버풀을요. 스티브 맥마나만 선수 때문에 리버풀을 알고 좋아하게 됐으니 족히 20년은 넘었네요. 박지성이 맨유에 갔어도, 손흥민이 토트넘에 갔어도, 리버풀과 붙는 맨유나 토트넘은 그저 적일 뿐이죠. 하지만 축구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팬심은 어쩔 수 없지만 축구는 최고의 흥분과 감동을 주니까요.


리버풀과 토트넘의 치열한 공방


#11 리버풀과 토트넘의 논란의 경기


안필드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경기 시간 1시간 전에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티켓에 있는 넘버를 잘못 해석해 이상한 입구로 갔다가 돌아오고 혼자 생쇼를 했다. 모든 경기장이 다 그렇지만 역시나 안필드도 삼엄하다. 몸수색, 가방 수색은 기본이다. 가방 수색을 마치면 리본 같은 걸 달아준다. 이 가방은 다 뒤져봤음 뭐 그런 의미? 가능하면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경기장에 오는 게 좋다. 그렇게 절차를 마치고 경기장으로 들어간다. 입구 회전문이 옛날 스타일이라 엄청 좁다. 나도 딱 맞는데 덩치 큰 영국 애들은 쉽게 통과하나 몰라.


좁은 입구를 지나면 휴게공간이 나온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복도에 매점과 휴게 공간이 있다. 다들 먹고 마시고 있다. 경기장에선 못 마시니 복도에서 마시나 보다. 휴게공간 TV에는 당연히 다른 구장의 경기가 중계되고 있다. 다들 TV도 보고 잡담도 하고 먹고 마시고 하면서 경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입구 앞 거대한 리버풀 엠블럼에서 셀카를 시도하고 있으니 친절한 직원이 찍어주겠다고 한다. 환하게 웃으며 관광객 모드로 촬영을 했다.


드디어! 안필드 입장!


짧은 복도를 지나 경기장에 들어섰다. 아직 경기 시간이 남아 관중석은 거의 빈자리였다. 안필드 내부 전경을 보고 L.F.C라는 글자가 새겨진 골대 뒤쪽 관중석도 바라봤다. 뭉클했다. 안필드 직관이라니 나이 먹고 이렇게 순수하게 좋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었다. 좌석을 보니 나는 피치에 가깝다. 경기장에서 6번째 줄이니까 매우 가까운 편이다. 오예! 경기 시작 전에는 더 내려가 경기장 펜스에서 선수들을 봤다. 근데 내 쪽은 원정인 토트넘 선수들이 몸을 푸는 자리였다. 젠장.


괜히 한 번 만져보는 잔디, 그리고 멀리 있는 우리 선수들


리버풀 선수들은 멀리 있었다. 관중석을 따라 가까이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거리도 멀었고 민폐가 될 것도 같았다. 많은 관중들이 피치로 내려와서 몸 푸는 선수들을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그 대신 내 앞으로 손흥민, 케인, 에릭센, 알리, 요리스 같은 선수들이 왔다 갔다 한다. 바로 앞은 아니지만 부르면 들릴 정도의 거리? 공을 차고 런닝을 하고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서 경기 준비를 한다. 주변에서는 한국인이니 손흥민을 응원하러 온 거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리버풀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후훗, 손흥민? 그저 적일 뿐이다!


몸 푸는 손흥민과 토트넘의 핵심 선수들


경기가 시작될 때가 되니 사람들이 하나 둘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나도 내 자리로 왔다. 주변에는 대부분 중년의 아저씨들. 여자분도 몇 분 있지만 거의 아저씨들이다. 근데 다들 지인들인 모양이다. 앞, 뒤, 옆으로 다들 인사하기 바쁘다. 중간에 낀 동양인 남자는 그냥 머쓱하게 앉아 있을 뿐. 드디어 경기장에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퍼진다. 모든 관중들이 따라 부른다. 나 역시 나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도리를 양팔로 펼치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뭉클하다. 이런 순간을 실제로 겪다니.


'You Will Never Walk Alone'과 함께 시작되는 경기


경기는 치열했다. 선제골은 우리가 넣었다. 살라가 3분 만에 골을 성공시키며 안필드를 달궜다. 이후엔 공방이 이어졌고 애매한 PK가 나왔지만 카리우스의 선방으로 고비를 넘겼다. 몇 번의 찬스를 주고받다가 교체돼 들어온 토트넘 완야마가 80분에 동점골을 넣었다. 제길! 하지만 후반 추가 시간 킹살라가 다시 골을 넣으며 경기는 2-1! 경기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든 관중이 흥에 취했고 이제 몇 분 후면 승리를 만끽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재앙이 닥쳤다. 후반 추가 시간이 끝나가는 무렵 라멜라는 영리하게 PK를 얻어냈고 케인이 성공시키며 2-2로 비겼다. 홈에서 애매한 판정으로 PK를 두 번이나 내준 끝에 거둔 무승부였다. 살라의 골은 환상이었고 안필드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곧 모든 소리는 심판에 대한 항의로 바뀌었다. 그래도 바뀌는 건 없었다. 3분 동안 천국과 지옥을 맛보고 경기장을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느낌이 다르다


근데 경기를 보는 관중들 모습이 참 재미있다. 사이드라인 쪽은 대부분 앉아서 자리를 지키면서 경기를 보는 편이다. 그러다 결정적인 상황이 오면 동시에 다 일어나고 상황이 종료되면 다시 동시에 다 앉는다. 볼이 사이드라인을 따라 가면 다들 반쯤 몸을 일으켜 고개를 쭉 빼고 사이드라인을 바라본다. 우리 팀이 실수를 하면 거침없이 욕을 한다. 무조건 칭찬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의자가 좁아 누군가 화장실을 간다면 다 같이 일어나 길을 터준다. 관중석 기준으로 제일 아래쪽은 욕하며 보는 곳, 중간은 응원하는 곳, 젤 위는 경기 보는 곳 같았다. 아래쪽에서는 응원도 열심히 하지만 욕도 아끼지 않았다.


허탈한 무승부로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후반 추가 시간 살라의 골이 터졌을 때 경기장은 그야말로 환호의 물결이었다. 나 역시 옆에 앉은 누군지도 모르는 리버풀 팬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가슴을 만져보라며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고, 나 역시 아저씨 손을 내 가슴에 갖다 대며 나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며 웃었다. 그렇게 딱 3분 웃고 우리는 험상궂은 욕설을 심판과 토트넘 팬들에게 쏟아냈다. 꼴 보기 싫게 골대 뒤의 토트넘 원정팬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심지어 이번 골이 케인의 100번째 골이어서 더 신이 났다. 그래서 PK를 두 번이나 주며 케인에게 기회를 줬나 싶었다. 하지만 100번째 골은 너무 늦게, 그리고 너무 어수선하게, 심지어 홈팬들의 분노 속에서 터졌기 때문에 100골 축하 응원 따위 묻혀버렸다.


리버풀의 밤길을 지나 숙소로 가는 길


그렇게 허무하게 경기는 끝났다. 모든 경기장이 그렇듯 원정팬들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홈팬들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났지만 일단 원정팬들이 나간 다음에 경기장을 나온다. 다들 터덜터덜 힘이 없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근데 차도 없다. 홈경기가 있는 날은 도로가 통제되고 버스도 시간을 바꾼다. 원정팬 버스가 다 떠나고 경기장 주변 정리가 다 끝난 뒤에야 버스가 정상 운행을 한다. 대략 1시간 반? 아니면 그 이상? 30분을 기다리다 못 참고 걷기로 한다. 늦은 시간, 어둑한 공원을 가로지르고 사람이 없는 도로를 지나 좁은 골목을 통과해 50분 만에 숙소로 왔다. 경기는 애석하게 비기고 다리는 아프고 내일 출발하려면 짐도 싸야 하니. 원래 경기 끝나고 버스 타려고 했는데 마침 딱 1파운드가 부족해서 20파운드 지폐를 깼는데 결국 걸어와 버렸다. 주머니에서 동전들이 짤랑거린다.


저녁을 부실하게 먹어서 오는 길에 테이크 아웃으로 샌드위치를 샀다. 배가 고파 2개를 골랐는데 음료도 2개를 사란다. 나 혼자 먹을 거라서 음료는 한 개면 된다고 했더니 그래도 안 된단다. 여긴 메뉴 하나에 음료 하나가 거의 룰에 가깝다. 하나 먹을 때는 몰랐는데 2개 먹을 때도 음료가 2개라니. 숙소 오는 길이 펩시 2캔 덕에 더 무거워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 끝내주는 안필드 직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