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 #08
웬디(다코타 패닝)는 성장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어 격리된 상태로 지낸다.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세상에 적응하지만 완전히 사회로 나오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 이런 와중에 평소 <스타트렉>의 광팬인 웬디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다. <스타트렉> 관련 시나리오를 공모한다는 사실. 남다른 재능으로 스스로 완벽하다 느낄 정도의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만, 마침 일어난 몸의 이상으로 우편 접수에 실패한다. 427페이지의 원고를 바라보던 웬디는 직접 파라마운트에 원고를 내기로 마음먹고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주거 지역을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이 영화는 장애가 있는 소녀(웬디)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지만 그 상황이나 그가 겪는 사건들을 어떤 누구에게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얘기다.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이나 주변에서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웬딩의 여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탠바이, 웬디>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사건을 겪느냐가 아니라 웬디가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과정이 있으려면 시작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그 시작이라는 것은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하겠다는 의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져 계기를 만들고 그렇게 한 발 한 발 디디면서 과정으로 연결된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미숙한 웬디는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얘기하기를 힘들어하고 중요한 얘기나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간중간 메모를 한다. 일반적인 대화의 흐름과는 분명 다른 행동이다. 웬디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정상이나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사회생활을 하는 보통의 많은 사람들 역시 사람 응대가 어렵고, 원하는 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난을 겪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와 같은 예상치 못한 시련에 부딪힌다. 하지만 웬디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쓸 줄 안다는 것. 퇴근 후에 TV나 보며 휴대폰으로 인터넷이나 끄적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랑 비교해도 천지차이의 열정이다.
하지만 웬디의 열정도 처음에는 갇혀 있는 것이었다.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시간에 맞게 해야 할 것들을 배분한다. 정해진 색깔의 옷을 입고, 날짜가 기록된 음식을 먹으며, 건너지 말아야 할 길은 건너지 않는다. 어찌 보면 웬디는 정해진 것들 안에서 쉽고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그 세상에 적응하며 시간을 흘려보냈겠지만, 웬디는 달랐다. 원대한 꿈이 있어서라기보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던 주변의 틀을 무너뜨렸다.
우리가 보기에 웬디는 어딘지 모자라 보인다. 보호자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람들에 치이거나 사기당하기 딱 좋은 캐릭터다. 하지만 웬디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힌다. 개와 함께 버스에 탔다가 쫓겨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우연한 도움을 받기도 한다. 평범한 우리의 삶들이 그러하듯, 웬디 역시 힘든 일과 좋은 일을 함께 겪으며 조금씩 자신의 목표인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 다가간다. 그리고 결국 원고를 접수한다.
이런 이야기를 보는 관객에게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당사자에겐 결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결과를 갖고 꺄르르 웃으며 마무리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혼자 자기만의 세상을 깨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발을 뗐다는 것만으로 이미 웬디는 물론 웬디의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 모두 한 뼘쯤은 성장한 것일 텐데. 그 성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서 성장의 가치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조금씩이라도 성장했고 그 성장이 또 다음 성장의 밑거름을 된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모두가 몸으로 체득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도, 직업을 찾고 있는 사람도 모두가 하루하루 성장해야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성장하지 않고 현상 유지만 해도 자신의 시간을 나름대로 쓸 수는 있다. 현상 유지만 된다면 나 외에 그 누구도 내가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걸 알지 못할 거다. 하지만 그래서는 다음 과정을 밟을 수 없다. 누군가 와서 공짜로 새로운 과정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계기를 만들어야 다른 일도 생기고 새로운 것도 겪게 된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코타 패닝은 잘 컸다. 연기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길 정도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을 부담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이다. 아마도 본인의 삶이 웬디랑 비슷하지 않을까도 싶다. 주변의 틀을 깨고 나가 낯선 세상과 조우하는 것은 커가면서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니까.
(사진 제공 :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