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먼저 올린 본식 선배들에게 들은 말이 있다. 본식 당일에 정신이 워낙 없어서 누가 다녀갔는지 연회장에서 누구와 인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종종 나중에 사진을 보고 나서야 ‘아 이분도 오셨구나’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신부대기실을 방문해준 모든 사람,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눈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왜냐고? 그들의 축하와 축복, 발걸음과 웃음 만개한 표정이 감동으로 남아 며칠 째 가슴앓이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날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몇 가지 복기하며 기록해두고자 한다. 받은 것은 두고두고 모아 평생 간직하고, 기회가 된다면 은혜를 갚고 싶으니까.
본식 당일 아침부터, 아니 사실은 꽤 며칠 전부터 나는 ‘예민 보스’였다. 본식 아침에는 짐을 챙기다가도, 고속도로가 조금만 막혀도 지체되는 시간 때문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크업샵에서 나를 생각해서 신랑이 “아아 사다줄까?”라며 10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안절부절 했다. 그러다가 나의 단짝 진영이가 메이크업샵에 도착했다. 본식까지 무려 5시간이나 남은 시점이었다. 친구의 얼굴을 보고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신부 입장 직전에는 30분 전에 먹은 청심환이 전혀 효과가 없어 기절 직전 상태인 내가 효과가 없다고 울부짖자 “청심환 먹어서 그나마 그 정도인거야”라며 일침을 놓아 나와 대기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녀 없는 내 결혼식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식장에 도착해서 웨딩카 하차씬 촬영을 하고 홀에 나가 보니 메이크업을 마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있었다. 신부가 주인공인 날이라고, 가족 친척들은 나를 보며 아름답다 칭찬했지만 내 눈엔 엄마가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엄마 눈에는 딸이 가장 아름다운 법, 엄마는 나를 보고 울먹거리며 “우리 딸 너무 예쁘다..”라고 감격의 말을 했지만 나는 “엄마! 그러면 나도 우니까 안돼! 눈물 한방울에 만원이야!”라고 말해 눈물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결혼식 축사도 엄마가 해주었는데 사실 나는 몇 주 전에 미리 엄마가 쓴 축사를 읽어보았다. 이유인 즉슨 당일날 울지 않기 위함이 가장 컸는데 본식 당일에 나는 엄마의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예식장에서 나는 계획대로 엄마의 덕담을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순간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지? 내가 미리 읽어본 엄마의 덕담 내용에 웃음 포인트가 있었던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하객들이 엄마 글솜씨가 좋다며 내 글솜씨 역시 엄마에서 온 것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흠, 글쟁이로서 약간 경쟁심리가 붙는 걸?
신부대기실에서의 축하는 정말이지 ‘과분’했다. 동창들, 첫 회사 팀원들과 상무님, 두번째 회사에서 함께 했던 열 명이 넘는 인턴들, 현재 재직중인 회사의 거의 대부분 직원의 참석,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먼 걸음을 해주신 스폰서님들, 전직장 선배들과 동료들, 친척들 … 끝이 없다. 한분 한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다른 일정(심지어 외국에 있던 사람)이 있던 사람, 육아해야 하는 사람, 멀리 사는 사람… 초대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분 한분의 사정을 백퍼센트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그 모든 걸음이 다 같지 않고 특별한 감사로 가슴에 남아있다.
어릴 때 다녔던 교회(지금은 부모님만 다니시는 교회)의 성도님들도 평택에서 서울까지 먼 걸음을 해주셨는데, 특히 사모님이 기억에 남는다. 내 이름을 부르며 오랜만이야, 반갑다, 너무 아름답다, 칭찬일색하시며 딸처럼 사진에 남기고 행복해 하시던 모습이 마음에 선명히 새겨졌다. 연회장에서는 친척들과 자세히 인사를 나눌 수 있었는데 특히 작년에 암투병을 해 살이 많이 빠진 친척 언니가 눈에 보였다. 반갑고 미안하고 고마운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그리고 (본인도 깊게 소망한 것 같은데) 신랑신부를 제외한 제 2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남동생이었다. 식 하루 전날 통화를 하는데 남동생은 “어머, 저 아니에요~”하는 멘트를 연습한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사람들이 신랑으로 오해할까봐 미리 멘트를 준비한다며 교만과 위트를 뽐냈는데, 사실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똑같이 생겼고 누가 봐도 남매지간이기 때문이다. 본식의 하이라이트는 나의 웨딩드레스 다음으로 남동생의 축가였다. 성가대, 뮤지컬 출신의 그는 나의 요구에 맞추어 성악 스타일로 축가를 불러주었다. 나의 로망 하나가 모든 지인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남동생을 자랑하는 것이었는데 그 하나를 이룬 날이기도 했다.
본식시간이 오후 3시 30분이었던 터라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집에 도착하니 밤 9시였다. 다음날도 신혼여행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어야 해서 축하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겨우 다 돌리고 급히 잠에 들었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그 순간까지도 지인들이 애정으로 담아준 그날의 사진과 영상을 볼 시간이 없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인터넷이 끊어지고 나서야 마침내 고요와 함께 감상할 시간이 생겼다. 그렇게 지인들이 사랑과 애정으로 담아준 천 여장의 사진과 영상을 찬찬히 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장면들이 담겼는데 본식 내내 활짝 미소 짓는 친구들과 회사사람들, 친척들의 얼굴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특히 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할만큼 커다란 감동을 받았는데 입장하는 순간 대기실에서 (평소 카메라도 잘 안쓰면서) 나를 열심히 담아주는 진영이, 예식홀에서 누구보다도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퇴장과 함께 맨 뒤쪽으로 위험하게(?) 달려가 피날레 사진을 찍던 주희, 승민, 해원이, 그리고 혼자서 로비부터 대기실, 본식까지 스냅작가만큼 열심이었던 쏠메 정민이, 그리고 한솔이, 효진언니, 유진언니…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그 영상과 사진을 보며 홀로 비행기에서 눈물을 훔쳤다.
30대가 지난 후로 나는 경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어릴 때는 어떤 것을 새로 터득하면 신기하고 즐거웠으며 동시에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허나 나이가들고 30대가 되어 깨닫는 것은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불가피한 순리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숙한 부모와 선배들에게 가르침 받아 미성숙을 조금씩 변모시켜 성숙해지고, 비로소 어느 정도의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후세대 혹은 후배의 미성숙함을 다독이고 품어주고 이끌어준다. 이런 면에서 인류는 축적이 아니라 그저 순환 같기도 한 것이다.
흔히 큰 경조사를 겪어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어른들의 말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수많은 결혼식을 참석하고 청첩장도 받아봤지만, 좋은 소식을 전하는 마음과 예절 그리고 하객들을 맞이하는 모든 일들이 어떤 것인지 결국 내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날 받은 축복은 축하해주신 분들에게 바로 보답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은 아직 깨닫지 못한 상대적 미성숙함의 후세대에게 베풂이라는 덕목으로 내려보내야 함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