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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

예술 이야기

'로망'... 아날로그 라이프 《핸드메이드》 & House gallery 2023



오늘,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로망(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이란 단어를 표제어로 적고 나니 문득, ' 내가 알고 있는 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나? '하는 궁금증에 사전 검색을 해봤는데!!! 로망이란 단어가 프랑스어였더라고요. 다 아셨나요????? roman. 게다가 불어 발음이 전혀 '로망'스럽지 않아서 더 의외였어요. ㅎㅎ

얼마 전에 방송을 보다가, 또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제 일상에서 한참 동안 실종됐던 로망이란 단어가 불현듯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잊고 있던 로망을 떠올리게 한 그 방송과 그 장소에 대해 소소하게 이야기해봅니다.

KBS 아날로그 라이프  《핸드메이드》 방송 캡처 © KBS


저는, 직접 자르고 다듬어서 뭔가 실용성 있고 보기에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게 로망입니다. 물론 타고난 금 손도 아닌, 보통 손입니다. 20대의 언젠가, 호기롭게 만들기를 시도했는데 그것을 본 친구의 혹평에, 그 이후로 '나는 재능이 없어'라며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 말을 무시하고 넘겼어도 됐는데 그땐 나름 충격적이어서. 그래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고 완성해 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늘 그렇게 동경을 품고 있다 보니 어지간한 공방 앞을 스쳐갈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유리창 앞에서 몇 번 서성이고 바라보다 발길을 돌리기도 했는데, (확실히 지금과는 다른 감성의 소유자였어요 그땐) 지금은 사고가 트인 건지 '내가 좋음 됐지 뭐' 이런 주의로 바뀌었음에도 생업에 밀려 다른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보게 된 게 바로 이 《핸드메이드》입니다. 제목 그대로 천천히、꾸준히 어떤 대상을 직접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핸드메이드'란 제목이, 지금껏 제가 이루지 못한 '만들기'에 대한 로망도 떠오르게 했고요. '짜 맞춤 가구、결이 살아있는 안경、바느질 구두、시계 손목 위 우주'라는 4개의 소주제를 각 2개씩 2주간 방영했는데, 4개의 에피소드들이 정말 다 흥미로웠지만, 독립 시계 제작자(현 강훈) 편은 특히 더 기억에 남습니다. 세계적으로 40여 명에 불과한 독립 시계 제작자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면서도 반가웠거든요. 또 같은 편에 나온 유럽 정통 방식의 '진짜' 수제 구두를 만드는 테리 킴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핸드메이드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봤고요. '핸드메이드'란 말이 요즘 여러 곳에서 너무 쉽게 쓰이는데, 그 only one의 희소성을 갖는 핸드메이드의 진정한 가치, 노력, 정성 그리고 기본이 어떤 건지를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만드는 과정 자체도 유의미했지만 출연자들의 짧은 대화에서도 스스로를 많이 투영하게 되더라고요. 보면서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만들면서 내가 정서적으로 받는 피드백은 어떤 건지 공감할 수 있었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은 이야기를 하는 출연자와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진행자의 케미가 중요한데, 유혜진이란 인물은 프로그램 성격에 참 잘 부합하더라고요.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님, 《한국인의 밥상》의 최불암 님 그리고 《동네 한 바퀴》의 김영철 님처럼요. 덕분에 보는 동안 어색한 곳 없이 배우 유해진에게선 소소하게 만들며 느끼는 행복을, 수공예 작업을 생업으로 하는 분들로부터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를 공유 및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영상은 천천히 걷는 듯한 속도감으로 만드는 행위와 대화를 모두 품고 있지만, 화면이 복잡하다거나 급하거나 느리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아요. 그냥 시나브로 스며듭니다. 밖은 개나리、진달래、앵두꽃 등이 피어나는 봄이지만 프로그램 화면은 멋진 설경을 담아내고 있으니 지금 챙겨 보면 더 환상적일 겁니다. 내용도, 화면도, 구성도.


이 프로그램을 보고, 이현승 시인의 "친애하는 사물들"이란 시가 떠올라서 조금 적어봅니다.


"(......)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 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 버린 것이다."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중에서 <친애하는 사물들> 발췌 

'하우스갤러리 2303'의 정경자 사진전  © 네버레스 홀리다


또 다른 로망은 사적인 공간에서 여는 제 큐레이션의 전시입니다. 이걸 저보다 먼저 이룬 분이 계시더라고요. '일상이 예술이다'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계신, ' 하우스갤러리 2303'의 기획자 겸 갤러리스트 강언덕 님. 서울에 위치한 30평대 아파트 23층 3호를 주거지에서 갤러리로 확장시켰고, 비밀스러운 사유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만드셨죠. 실제로 살고 있는 공간에 작품을 걸고, 3개월 정도 주기로 전시를 교체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미술관이나 갤러리와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런 점이 더 '미술작품의 최종 종착역이 미술관이 아닌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갤러리스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거죠.

'하우스갤러리 2023'의 정경자 사진전  © 네버레스 홀리다


지금 제 방엔 오리지널 미술작품이 한 점도 없어요. 우선 있어도 걸 수가 없고요 (사방이 무언가로 가득 차있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조그마한 소품이나 인쇄물, 레플리카만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죠. 그래서 늘 생각합니다. 좀 더 공간을 넓히게 되면 이런 기획으로 이런 전시해봐야지라는. 요즘은 작품을 소장하는 분들이 많아졌죠.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한두 점의 무언가로 장식된 일상의 장소들도 많이 보이고요. 작품이 놓이는 곳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호텔 아트페어 같은 기획도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상하게 호텔방을 들락날락하며 작품을 보는 일은 익숙해지지가 않더라고요. 하물며 실제 사용하고 있는 어떤 가족의 사적 공간에 걸린 작품들을 모두 둘러보고 오니, 2303의 갤러리스트가 더 용기 있어 보였습니다. 불문율처럼 크고 높은 하얀 벽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빛이 퍼지지 않고 초점이 잘 맞는 사각 조명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작품 설명 레이블도 부착해야 할 것 같은 '이래야 할 것 같은 그 모든 불문율'을 깬 곳이 있다는 자체가 좋았어요. 대안공간들에서 열리는 작은 전시들은 이미 그런 불문율을 깨고 있지만 한 가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은 최소한 분리되어 있으니까요. 가족의 공유 공간에서 가족의 이해와 지원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하우스갤러리2303의 전시를 보려면 먼저 하우스갤러리(housegallery_2303)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관람 신청을 해야 합니다. 접수가 되면 갤러리스트가 주소를 보내주죠. 홍대에서 예술학 전공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재직한 이력을 갖고 있는 기획자 겸 갤러리스트인 강언덕 님은 열정이 많은 분이더라고요. 매번 누군가가 올 때마다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잘 설명해 주시거든요. 그 공간에 놓인 작품이 전체 20여 점은 족히 넘었는데 하나하나 어떻게 소장을 했는지,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작품의 이력은 무엇인지 등을 소개해 주고, 또 방문자의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을 해줍니다. 기분이 좀 묘하더라고요, 분명 친구 집은 아닌데, 친구 집처럼 그의 가족을 보고, 가족의 생활을 보고, 작품 전시도 보고 나니 뭔가 나도 하나는 내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저는 어떤 일을 하고요...'라는 말을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ㅎㅎㅎㅎ 묘해요. 곧 다음 전시 공지가 나올 테니 기다렸다가 한번 방문해보세요.


얼마 전, 제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적 있는 뱅크시의 <game changer>(2020)가, 그의 작품 중 가장 비싼 16,758,000 GBP에 낙찰되며 다시 주목을 끌었죠. 이 작품은 코로나로 힘든 영국 의료진(단체)을 위한 아티스트의 선물이었거든요.

BANKSY, <Game Changer>, oil on canvas, 35 7/8 x 35 7/8in. (91 x 91cm.)

Painted in 2020, Gifted by the artist to the present owner in 2020. Literature: W. Gompertz, New Banksy Artwork Appears at Southampton Hospital, in BBC News, 6 May 2020. 출처: https://www.christies.com/lot/lot-banksy-game-changer-6309459/?from=searchresults&intObjectID=6309459


영국에서 코로나 19 확산이 시작된 지난해 5월, 뱅크시는 사우스 햄프턴 대학병원 자선단체에 이 그림을 소포로 보냅니다. 깜짝 기부였어요. 이런 메모도 곁들였죠. “당신들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이 그림이 비록 흑백이지만 병원의 분위기를 밝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Thanks for all you’re doing. I hope this brightens the place up a bit, even if it’s only black and white.”라고. 이 그림은 한참 동안 응급 병동에 걸려 있었고, 올해 경매시장 나오게 됐죠. 그 결과, 동시대 핫한 아티스트가 그린 이 스토리 가득한 작품은 작가의 기존 상위 낙찰 레코드를 모두 갈아치웁니다. 수익금은 영국 전역의 보건 기구와 자선 단체는 물론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의 복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라고 해요. 그들의 로망을 이뤄줄 하늘의 선물인 거죠. 또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는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맞고 난 후 그곳에서 대기하는 동안, 자신의 악기를 꺼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과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등을 연주해 장내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선사했다고 하죠. 세상에... 요요마의 연주 직관이라니... 이런 행운이 제게도 오길 바라봅니다.




뱅크시 관련 이전 블로그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verlesshollida-1&logNo=222070457523&referrerCode=0&searchKeyword=%EB%B1%85%ED%81%AC%EC%8B%9C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20-1662&program_id=PS-2020208695-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code=04

https://www.christies.com/lot/lot-banksy-game-changer-6309459/?from=searchresults&intObjectID=6309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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