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어쩌면.. 작가 이야기)
드라마 《그해 우리는》 속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 Thibaud Hérem'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그해 우리는》, 본 분들 많으시죠?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중간 에피소드를 본 그날부터, 저 역시 다시 보기와 본방 사수하며 탐독(耽篤) 한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볼 땐 딴짓도 종종 하는데 이건 그럴 수가 없게 꼭 시선을 붙잡고 있더라고요. 뭐, 덕분에 책 정독하듯 수채화처럼 예쁜 화면과 네 청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하면서 봤습니다. 극 중 메인 롤을 맡은 국연수(김다미)와 최웅(최우식 분)의 합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서 정말 저들이 현실에 존재했다면 마음껏 응원을 보냈겠다 싶더라고요.
제 친구는 이 드라마가 완전히 '배우 최우식을 위한 드라마'라고 정의 내렸는데 그만큼 그의 무드를 잘 옮겨왔습니다. 얼마 전 홍콩 잡지 표지 모델을 선 김다미 배우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김다미 배우가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빌어봤어요 ㅎㅎㅎ 왜 한참 인기 있던 대만의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소녀" 류의 주인공들처럼요.
극본을 쓴 이나은 작가는 2016년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으로 데뷔, 장편 드라마 데뷔작이 《그해 우리는》입니다. ‘전짝시’가 웹드라마 최초로 조회 수 1억 뷰 이상, 2019년 웹드라마 ‘연애 미수’도 성공하면서 ‘청춘 로맨스물 장인’이라는 애칭을 얻었죠.
저는, 작가가 EBS 다큐에서 본 모티프를 발전시킨 드라마의 형식이 좋았고, 사계절을 통해 개개인이 지나간 청춘의 계절을 은유한 대목, 드라마 매 회의 부제를 영화 제목을 차용해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 점이 좋았어요. 또, 드라마 OST도 큰 화제였어요. 이승윤의 '언덕 나무'와 BTS 뷔가 부른 'christmas tree' 포함 11곡의 수록곡이 다 좋거든요. 라인업도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극 중 최웅의 그림입니다. 건물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최웅의 그림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죠. 그 그림의 원작자가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 Thibaud Hérem입니다. 티보 에렘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주요 장소인 호텔을 그린 작가로 우리에겐 익숙합니다.
이나은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최웅의 직업을 일러스트레이터로, 국연수의 직업을 홍보대행사 팀장으로 설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더라고요.
"웅이와 연수를 어떻게 하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차에 티보 에렘 작가님의 그림을 보게 됐다. 그림이 섬세하고 예리한데 따뜻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이 웅이의 성격과 가장 닮아 있었다. 연수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 주변의 인물처럼 느낄까를 생각해서, 홍보대행사의 팀장으로 설정하게 됐다."라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일러스트는 그의 첫 협업작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건물이 아닌 영화만을 위해 특별히 창작한 건물로, 체코에 있는 세 빌딩 스타일을 조합해서 완성했죠. 그는 웨스 웨더슨의 작품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웨스 웨더슨의 작품'이라는 게 첫 협업을 결정한 이유이지만, 그는 당시 사귀고 있던 사람을 위해 그렸다고 말하더라고요. ( 다른 이유들도 더 있지만요.) 그래서 건축물의 색이 핑크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완성된 후에 연인과 함께 보러 갔으니 그야말로 그에겐 인생작이 아닐 수 없죠. 600시간을 넘게 그려 완성한 큰 도전이기도 했고요. (인터뷰마다 작업 시간이 조금씩 달라요.^^::) 그런 이유로, 작가는 이 작품을 "사랑의 그림"이라고 하더라고요. 영상에서 이 인터뷰를 보는데 표정이 정말 너~무 좋아서 캡처해서 올려봅니다. 이 호텔 장면이 나오면 앞으로는 연인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어지지 않을까 싶네요.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그때 제 표정을 보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요 ㅎㅎㅎㅎ 워낙 미스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호텔인지라.
드라마에 노출된 그의 그림들은 작가 인스타그램과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인스타는 '#그해 우리는', 홈페이지에서는 영문 제목인 'OUR BELOVED SUMMER'으로 구분해두어 쉽게 찾을 수 있어요. 드라마 방영 후 작가의 인스타 팔로우 수가 많이 늘었는데 그 답례로 얼마 전엔, 국화 일러스트와 함께 작가가 감사의 말을 남겼더라고요. 저와 제 친구도 팔로워입니다, 오랜 팬이라.
그는 건축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건축 사업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살 때는 영국 건축가 협회 강연이나 콘퍼런스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현재 스튜디오도 건축가 친구와 공유하고 있대요. 한 인터뷰에서 건축 디자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건물에 대한 심미적 접근에 더 의미를 두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가진 건물 그리는 것이 작업 방향이라고 하죠. 드라마를 위해 새롭게 그려진 작품들도 대부분 주인공의 서사 속 중요한 장소들이거든요.
그는 2018년도에 한남동 알부스 Albus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어요. BTS RM이 이곳에서 그의 작품을 구매하면서 국내에는 더 알려졌죠. 이후 RM이 그에게 그림을 의뢰해 <벚꽃나무>라는 작품을 받기도 했고요. 알부스 갤러리는 국내 첫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갤러리로, 현재 '이규태'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유료 전시인데, 인기가 너무 좋아서 전시 기간을 연장했음에도 이미 예약 완료되었더라고요. 아쉽지만 도록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출품작은.
티보 에렘의 2018년 서울 전시 역시 제가 한창 바쁠 때라 현장에서 보진 못했는데, 유의미한 작업들이 많았더라고요. 우선 제 눈에 들어온 작품은 <mommoth>, <윤보선 고택>, <palace tree> 그리고 <south korea>입니다.
가상의 컨테이너 배를 그린 <mommoth>는 앞서 언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600시간을 들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인터뷰마다 작업 시간이 살짝 다르긴 한데 600-700시간 정도 걸렸다고 해요. ) 알부스 갤러리 전시를 위해 그린 것으로 디지털 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의 고집스러움이 응축된 작품이죠. 그는 0.1mm의 펜으로 작업하며 건물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시판되어 구매 가능한 펜 중에서 가장 얇은 선을 그릴 수 있는 펜을 사용해서 그리니, 말이 600시간이니 분명 그 이상의 시간이 더 들어갔을 거라고 봅니다. 참 고된 작업일 텐데, 워낙 디테일이 많은 건물을 좋아하고 또 더 얇은 펜으로 더 디테일하게 그리는 걸 즐긴다고 하니, 천생 예술가라고 말할 수밖에요.
드라마에서도 100시간 동안 건축물을 그리는 프로젝트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윤보선 고택>은 새로운 건축 양식 드로잉에 도전한 결과물입니다. 아시겠지만 한옥은 정말 그리기 어려워요. 저도 예전에 한옥 펜 드로잉을 시도해 봤는데,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근현대 외국 건축물에 비해 동양 전통 건축물은 건축 자재부터 시작해서 굴곡과 디테일이 많아 정말 어렵더라고요. 거기에 명암도 일정 간격으로 그려 넣었으니 저 그림이 얼마나 공이 들어갔을지는 가늠이 됩니다. 그의 작업에서 선과 그림자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건물의 대칭적인 특색이 중요해서 슬림하고 평면적인 건물도 그리기는 하나, 그림자를 사용할 수 없어 자주 그리진 않는다고 해요. 전체 건축물의 균형과 비율을 보고 선과 그림자를 통해 어떤 모양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를 거듭한 후에 그리는 데, 한국 건축물이 가진 특유의 비율감과 스타일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palace tree>는 덕수궁에 있는 고목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건축물만큼 자연물, 그중에서도 나무를 즐겨 그리는데, 나무를 그릴 땐 색을 좀 더 풍부하게 써서 형태감을 더 두드려지게 하죠. 스스로가 나무 기르는 재미에 빠져 관련 그림을 그려 책도 내었는데, 나무를 그리는 일이 그에겐 '극도의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건축물 작업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다 주는 초콜릿과 같은 행위'라고 하더라고요.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나무도, 가상의 나무도 그리고요. 아무래도 건축물의 직선, 곧은 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해방감을 주긴 할 거예요. 평소 4~5개 그림을 동시에 작업하는데, 그중 한 점으로 꼭 나무를 그린 대요.
『나무 이야기- 나무는 어떻게 우리 삶을 바꾸었는가?』(2020)라는 책이 있는데, 영국의 저명한 원예전문가가 소개하는 인류의 삶을 바꾼 100가지 흥미로운 나무 이야기로, 이 책의 나무 세밀화는 모두 티보 에렘의 일러스트입니다.
2018년 전시회 출품작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south korea>입니다. 건축물 상단에 태극기가 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그림은, 작가의 홈페이지 작가 소개 옆에 메인 이미지로도 사용 중이에요. 한국 국적이 아님에도 태극기가 전면에 들어간, 그것도 한글 문패까지 달아둔 이 작품은, 서울 전시를 위해 제작된 가상의 건축물입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스스로가 찾은 균형을 대신하는 작품이래요. 무엇보다 그의 작업 특징과 대표적인 이미지들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가상의 건물을 그리는 것을 이렇게 말했더라고요.
“직접 보고 상상한 갖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모아 그리는 작업을 하다 보니 새로운 타입의 건물을 만들어내는 게 흥미롭다. 건축학적으로는 말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제 작업은 건물의 설계도나 평면도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건물의 ‘초상화’를 그린다. 건물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를 담아서 소통한다.”
그의 한글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작품 외에도 작가의 작업 중엔 한글 및 한국 문화가 반영된 작업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한글을 조금씩 알아가는 단계이지만 아직은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디자인의 관점으로, 글의 의미보다는 그림의 이미지로 먼저 그에게 와닿는 거죠. 한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한글 단어를 물었을 때 "뽀뽀"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티보 에렘의 "티보"가 가족 출신지의 언어로 "kiss"라는 의미래요. 의미가 같아서 좋아한다고 ㅎㅎ.
김치찌개랑 막걸리를 좋아하고요. 한국에서 본 흥미로운 상품 패키징을 그림으로 여럿 남겼더라고요.
그런 이유인지, 콜라보도 종종 했어요. 삼성 비스포크(2019), 프린트 베이커리 아트상품, 스튜디오 톰보이(2020년)가 대표적입니다.
한남동 비이커 건물은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물이라 가져와봤고, 논픽션도 제가 사용하는 브랜드라 반가워서 가져와봤어요. ^^
청와대, 남산타워를 그려보고 싶고, 명동 성당 그림은 의뢰를 받았다는데, 빨리 보고 싶네요.
원래는 티보 에렘과 다른 작가를 함께 소개드리려고 했는데, 글이 넘치기도 했고,
쓰던 글이 저장이 안 되어 한번 날리고 어제에 이어 오늘 다시 쓰다 보니 기력이 떨어졌어요.
이번에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 집니다.
웃픕니다, 진짜.
저장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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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nstagram.com/thibaud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