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2022. 04. 28.~ 08. 28.)
작년 7월부터 약 11개월 동안 진행된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시즌 1이, 며칠 전 종료되었습니다. 피케팅 바람을 몰고 온 이 전시는 총 24만 8천704명이 관람했는데, 거리 두기 예약제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 숫자가 배는 더 되었을 거예요. 저도 한 번 더 도전해 볼까 했는데 예약은 너무 치열했고 이후 바뀐 현장 대기 방식은, 매번 긴 줄을 볼 때마다 보고 싶다는 욕구를 사그라들게 하더라고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대규모 전시도 멀지 않았고, 8월엔 시즌 2 성격의 이중섭 전시가 서울관에서, 하반기엔 파블로 피카소 등의 작품을 공개하는 세계 미술 명작 전시가 과천관에서 개막 예정이라는 걸 알아서 더 적극성이 발현되진 않았던 것도 있고요.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로, 정선 <인왕제색도>(국보), <금동보살 삼존상>(국보), 김환기 <산울림>, 클로드 모네 <수련>, 이중섭 <황소>, 박수근 <한일> 등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및 공립미술관 5개 처(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 이건희 컬렉션 355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몇 년만 기다리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음에도, 이만큼 작품이 모아진 경우가 드무니 저도 예매를 하게 되더라고요. 무엇보다 시기적으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미술 장르 구분으로는 회화, 미디어, 설치, 조각, 서적, 도자, 불경 등 그야말로 보는 재미가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지나치기 어려운 전시죠.
전시 예약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티켓 판매 시작 후 얼마 안 지나 구매했는데도 이미 매진된 시간대가 대부분이었어요. 주 7일 전시에 한 회당 100명씩 10시부터 30분 단위로 15회로 총 1500명이 관람 가능한데, 예약 시간에만 입장 가능하고, 현장 판매분도 언제 매진되는지 바로 전산에 반영되지 않다 보니 신중하게 사전 예약하고 가야 합니다. 현재 7월 전시분까지 예약이 가능하고, 8월 예약은 6월 말부터 가능하니 참고하셔서 꼭 예약에 성공하길 바랍니다. 아, 전시 작품 중 <인왕제색도>는 5월에만, <추성부도>는 6월에만, <불국설경>은 7월에만 <호접도>는 8월에만 전시되니 참고하시고요. 작품이 교체를 기준으로 예약 시작 시점이 나뉘거든요.
2021년 4월 28일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은 그의 수집품 중 문화유산 2만 1,693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근현대 미술작품 1,488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근현대 미술작품 102점을 광주시립미술관(30점), 대구미술관(21점), 양구 박수근미술관(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12점), 전남도립미술관(21점)에 기증했죠. 당시 이 작품들을 보러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건희 투어가 생길 만큼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이번 전시는 이 중에서 선별된 작품들로, 국립중앙박물관은 정선(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등 249건 308점을, 국립현대미술관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 34건 35점을, 광주시립미술관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 대구미술관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한일(閑日)>, 이중섭미술관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현해탄>, 전남도립미술관은 천경자(千鏡子, 1924~2015)의 <만선(滿船)> 등 공립미술관 5개 처에서 총 12건 12점을 출품했습니다. 전시 작품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출품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 등 국보 6건 13점과 <삼현수간첩(三賢手簡帖)> 등 보물 15건 20점도 포함되어 있어, 정말 보지 않고 지나간다는 게 여간해서 쉽지 않은 전시입니다, 예술 애호가 입장에선.
고 이건희 회장은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사에서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이번 전시는 그의 수집과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증품의 다양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기획되어 문화유산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전시 작품을 선별했고, 전시 구성도 1부는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로 2부는 ‘저의 수집품을 소개합니다’로 크게 구분했어요. 2부는 다시 4개의 소주제로 나눠집니다. 근데, 사실 구성이 눈에 잘 보이진 않습니다. 전시장을 들어선 이후로 줄곧 다른 사람들의 등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등과 어깨를 스쳐 작품을 보게 되거든요. 어쨌든, 소장자의 안목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1부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는 컬렉터의 집을 은유하는 공간으로 꾸몄어요. 컬렉터의 안목과 취향을 보여주는 수집품이 대부분으로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가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정효자전(鄭孝子傳)>과 <정부인전(鄭婦人傳)> 등 ‘가족과 사랑’을 주제로 한 근현대 회화와 조각 작품을 두루 볼 수 있습니다. 또, 18세기 <백자 달 항아리>와 김환기의 1950년대 <작품> 등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관통하여 느낄 수 있는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1부에서 관람객들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으로는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만년에 그린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과 정선의 <인왕제색도>입니다. (배치 순서 기준) 수련 연못은 모네가 1914년부터 프랑스 파리 근교 지베르니 자택에 위치한 수련 연못을 그린 250여 점의 수련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국내 첫 전시 출품으로, 다른 전시 작품들과 분리되어 단독 공간에 놓여있습니다. 이 작품 앞에는 수련을 빙 둘러싼 관람객들이 있고요. 다른 작품에 비해 대부분 오랫동안 서 계시더라고요. 100.0 ×200.5cm로 크기가 작진 않은데, 단 한 점이 아닌 수련 연작 전시에 익숙해서 그런지, 색과 구성이 다른 연작들에 비해 좀 밋밋해서 그런지, 검은색으로 마감된 벽 때문인지, 확 와닿지는 않더라고요 작품의 존재감이. 게다가 가까이에서 좀 찬찬히 보고 싶은데, 너무 많은 분들이 계시다 보니 그 근처에서 어떤 움직임을 더한다는 게 살짝 부담스러운 공간이라 저는 그렇게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더 이슈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21년 5월 12일(현지시각)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모네의 1919년 작 ‘수련 연못’(Le Bassin aux Nympheas)이 7,040만 달러, 한화로 약 800억 원에 낙찰된 영향도 있어요. 낙찰 예상가인 4,000만 달러(450억 원)를 훌쩍 넘는 금액으로, ‘이건희 컬렉션’의 모네 작품과 같은 주제, 동일한 크기, 유사한 화풍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었거든요.
저는 정선 필 <인왕제색도>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현재 이 작품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로 교체 전시되었는데, <추성부도>역시 한 달 후에는 다른 작품으로 교체 전시됩니다.
<인왕제색도>는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삼청(三淸), 청운(淸雲), 궁정동(宮井洞) 방향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진경산수로, 산의 절반을 가려주는 안개와 습윤한 바위 표현이 압권이죠. 1984년에 국보로 지정된 작품으로, 문화재청 공식 명칭은 '정선 필 인왕제색도'입니다.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초분광 분석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그림의 푸르스름한 빛깔은 먹으로만 표현한 것이며 밑그림 없이 단번에 그린 작품이란 것이 밝혀지기도 했죠. 처음 본 작품은 아니었는데, 워낙 오랜만에 본 것도 있고, 곧 교체된다고 하니 더 자세히, 오래 보게 되더라고요, 구석구석. 올해 초 호랑이해를 맞아 인왕산에도 여러 번 올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실경과 자꾸 비교하며 보게 되고요. 게다가 요즘 핫플로 변한 청와대 주변을 거닐다 보면 그림 속 실재의 풍경을 비슷한 각도에서 보게 되어 더 각인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비 갠 뒤 인왕산의 모습을 본 적은 없어서 올 장마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지금도 안개가 저런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ㅎㅎ.
2부 ‘저의 수집품을 소개합니다’에서는 수집품에 담긴 인류의 이야기를 네 가지 소주제로 나눠 보여줍니다. 첫 번째 소주제인 ‘자연과 교감하는 경험’은 조선시대 산수화와 현대 회화를 함께 전시하여 자연이 영감의 원천이었음을 보여주고, 두 번째 소주제인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에서는 인간이 흙과 금속을 활용하여 만들어낸 토기와 도자기, 금속공예품을 전시하고 있어요. 회화를 제외하고도 하나같이 다 무게감 있는 작품들인데 회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관람객들이 머무는 시간이 적어 아쉽더라고요. 저는 박물관과 미술관 두 스타일의 전시를 다 좋아하는데, 일반적으로 박물관은 아이들과 함께 오는 분들이, 미술관은 그 외의 분들이 많이 찾습니다. 아마 박물관 유물이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학습을 위한 대상'으로 굳어져, '고루하다'거나 현재와 '동떨어져있다'라고 여기는 선입견 때문일 것 같은데, 잘 보면 아시겠지만 대부분 작품들의 영감이 자연이나 일상생활에서 온 것들이 많아서 현재에도 통용되거나 차용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정보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창작의 결과물들로, 지금보다 더 기발하고 대체 불가능한 아이디어로 탄생한 것들이 많습니다. 창의력을 기르기에, 현재의 미술을 이해하기에 꼭 박물관 전시를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자주, 많이 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지만, 만들어진 시대가 다를 뿐 공감대나 예술성, 기술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고요.
2부 세 번째 소주제 ‘생각을 전달하는 지혜’에서는 종교적 깨달음과 지식이 담긴 불교미술과 전적류를 전시합니다. 대표 유물 격인 고려불화는 4-6월까지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고려 14세기)가, 7·8월은 <천수관음 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고려 14세기, 보물)로 교체 전시됩니다. “기록 문화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정보화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더욱 힘들다”라는 사명감으로 『초조본 현양성교론(初雕本顯揚聖敎論)』(고려 11세기, 국보), 금속활자로 인쇄한 초간본 『석보상절(釋譜詳節) 권 20』(조선 1447~1449) 등을 수집했다는데, 그 귀중한 옛 책도 전시 중입니다.
재밌는 게 정말 많아요. 당대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은 거의 다 한 점 이상씩 소장했던 것 같고, 특별전이나 기획전 등에 특별 대여되어 전시되었던 주요 작품들도 있고, 경매에서 봤던 작품들도 있고요. 예전에, '단 한 점'을 위해서 전시를 찾았던 '그' 작품들을 이곳에서 다수 만날 수 있죠. 그 소장 및 수집 규모도 놀랍지만 그 안목도 볼수록 범상치는 않습니다. 보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들어요. 분명 실패한? 컬렉션도 있을 텐데, 나중에 그 작품들만 따로 모아 전시해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마지막 2부 소주제는 ‘인간을 탐색하는 경험’으로,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된 개인의 주체적 각성을 예술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작품은 좋은데, 전시 규모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에 남는 작품이 많진 않습니다. 저는 자료적 성격의 사진을 많이 찍어서 다른 분들보다는 좀 더 기억을 오래 하겠지만, 미술에 큰 관심 없던 분들이 보면 몇 작품 외엔 '그런 게 있었나?' 싶은 작품들도 다수일 거예요, 도록을 사지 않는다면.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출품작 355점 중 44건을 해설과 함께 별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술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 작품들의 설명을 보고 가도 좋아요. 큐레이터 선정작이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하고, 이 작품들만 자세히 보고 나오셔도 투자한 시간에 대한 보상은 되니까요. 좋은 작품들은 많은데, 전시장 내 사람도 많고 관람시간 2시간도 짧다 보니 감상이 쉽진 않더라고요. 저는 오후 시간대에 갔는데, 오전 시간에 가서 충분히 시간 갖고 보면 더 좋았겠다 싶긴 했어요.
요즘 미술 작품을 소장하려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도 없던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작년과 올해, 미술시장 활황이라는 뉴스와 함께 컬렉터의 길로 들어선 분들이 더 눈에 띄더라고요. 컬렉터가 되기 위해 자문을 구하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미적 가치 향유를 위한 소장도 있지만 주식이나 부동산 대용으로 하려는 분들도 종종 뵙는데, 그분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꼭 이런 말씀을 드려요.
"전시 많이 보고, 꼭 공부하셔야 해요."라고.
목적이 무엇이든, 어떤 것을 시작하든 배움의 시간은 꼭 필요하니까요. 다양한 의미에서 좋은 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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