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키키 스미스 Kiki Smith- 자유낙하 Free Fall》서울시립미술관(2022.12.15~2023.03.12)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소개드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고, 지금도 평일 주말 상관없이 많은 분들이 찾고 있는, 어렵지만 확실히 곱씹어 볼수록 좋은 전시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시장을 찾을 분들을 위해 2023년 첫 글로 소개해 드립니다.
키키 스미스는 미술에 관심 없는 분이라면 아주 생소한 작가일 거고, 조금이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오! 키키 스미스"라고 탄성을 자아낼 작가죠. 1954년 생으로, 1980~1990년대 여성성과 신체를 주제로 한 구상조각으로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았고, 권위 있는 다수의 여성작가상은 물론, 타임지 선정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 100인(2006년), 힐러리 클린턴이 수여하는 미 국무부 예술훈장(2012년) 등 수상 경력도, 전시 경력도 화려합니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로, 이번 전시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그의 첫 대규모 전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많지만, 그동안은 출품작 10여 점 미만의 갤러리 전시뿐이어서 '키키 스미스'라는 작가를 충분히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전시를 기다렸고, 또 보러 가지만, 작품을 읽어내기가 녹록지는 않아요. 물론, 도슨팅 앱과 작품 설명이 잘되어 있어 단편적으로 이해하긴 쉽지만, 연대기적 구성의 전시가 아니라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알지 못하면 설명을 참고해도 속시원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들이 여전히 남아있죠. 게다가 <자유낙하>라는 전시 제목이 주는 난해함도 한몫하는데, "중력만이 작용하는 물체의 운동"을 일컫는 물리학 용어인 자유낙하는, 이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작가의 작품 활동을 묶는 연결점이고, 1994년에 발표한 작가의 작품 이름이기도 합니다. 전시를 처음 봤을 땐 수수께끼가 가득해서 어려웠는데, 공부를 조금 한 후에 다시 보니 그 안에서 소소한 재미들이 있더라고요, 물론 지금도 알아가는 중입니다.
140여 점의 출품된 이번 전시는 <이야기의 조건 : 너머의 내러티브>, <배회하는 자아>, <자유낙하: 생동하는 에너지> 총 세 개의 키워드로 1층 전관, 2층 전시장 한 곳에서 진행 중입니다. 전시장을 가본 분은 알겠지만, 섹션 경계가 모호해요. 전시 구성 자체가 '정원을 산책하는 듯'한 콘셉트로, 동선을 따로 확정 지어두지를 않았거든요. 하지만 기본 개념만 잘 잡고 보면 오히려 동선이 열려 있어 더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개도, 섹션이 아닌 작품 위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키키 스미스는 예술가 집안에 장녀로 태어납니다. 아버지 토니 스미스는 당대 저명한 미니멀리즘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유명한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였죠. 여동생이 둘이지만, 한 명은 에이즈로 1988년에 사망해요. 전문적인 예술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토니 스미스의 조각 작품의 기본이 되는 종이 모형을 세 자매가 만들고 놀면서 예술에 자연스럽게 입문했죠. 아버지 친구들인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바넷 뉴먼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도 자주 집에 놀러 왔었다고 하고요. 실제로 미술과 관련 없는 일들을 하다가 1970년대 후반 제니 홀저, 톰 오터니스, 카라 펄만 등과 함께 뉴욕의 행동주의 미술가 그룹인 콜렙(Colab)에 참여하게 되면서 한동안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작가로 활동을 합니다. 이때 재밌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다양한 소재를 다뤄보기도 하고, 작가로서 활동하는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며 평생 작업 활동에 필요한 영양분을 축적했죠.
키키 스미스란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1980~1990년대 작업부터입니다. 앞서 말한 여성성과 신체를 주제로 한 조각에, 가정 폭력, 임신 중절, 에이즈 등 당시 신체를 둘러싼 1980년대 미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를 작품의 소재로 다루면서죠. 신체를 주제로 한 조각의 시작은 친구가 선물해 준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를 본 후인데, 1980년 스승과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과 1988년 여동생 비비 스미스가 에이즈로 죽자, 신체를 통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업에 더욱 탐닉하게 됩니다.
<세상의 빛>은 푸른색 위에 하얀색으로 반짝이는 윤슬에, 그냥 홀린 듯 그 앞에 서게 되는 작품입니다. 동판화 기법인 에칭과 사진 인화 기법인 시아노 타이프(블루프린트)의 결합으로 제작되었는데, 원래 18점이지만 이번 전시엔 16점만 볼 수 있어요. 작가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살면서, 일주일에 4,5번 정도 아침마다 이스트 강을 따라 걸었다고 해요. 2005년 이탈리아 전시를 앞두고 이스트 강(east river)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핸드폰과 카메라로 영상 및 사진을 촬영했고, 그렇게 준비된 자료는 수년간 묻혔다가 몇 년 후에야 빛을 발하게 되죠. 당시 자신의 판화 수업에 참여한 학생이 시범 보인 시아노 타이프 작업에 작가가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시아노 타이프와 에칭의 접목으로 나온 작품이 바로 <세상의 빛>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세밀한 에칭 효과를 느낄 수 있는데, 햇빛이 투과된 곳은 파랗게, 햇빛이 막힌 곳은 하얗게 표현되었고, 여러 판을 겹쳐서 만든 작품이다 보니 실제 강물에 햇빛이 비친 듯 자연스러운 빛(윤슬)이 그대로 구현되었죠.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를 소재로 만든 조각입니다. 아름답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가진 여성인 메두사는 아테나의 저주로 머리카락은 뱀으로 변하고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돌로 굳게 되는 마녀가 됩니다. 매혹적이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메두사를, 작가 자신의 몸을 청동으로 본떠 등신대 입상으로 구현합니다. 하지만 메두사의 상징과도 같은 머리카락은 제거되어 관람자는 그를 메두사로 인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혹적이거나 두려운 존재로도 보기 어렵게 되죠.
1980~1990년대는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적 사회였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남성 조형물이 있고 그것만 '인간'이라고 읽었던 시대였다고 합니다. 작가 역시 여자로, 여성 작가로 살아가는 것에 좌절감을 맛보았던 시기였고요.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는 여성 작가는 프리다 칼로, 루이스 부르주아 정도로, 여성 작가의 작품을 창작으로 알아주는 영역도 매우 제한되어 있었고, 당시 미술관에 걸리는 여성 작가의 작품이 10%도 못 미친 것에 비해, 미술관에 전시된 여성 누드화나 조각상은 과반수를 넘어섰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을 보면 키키 스미스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작가들도, 여성을 보는 타자적 관점이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 미술계에 존재하는 여성 작가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에 대한 의견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킵니다. <메두사>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징 도상들을 제거해 관찰 대상을 성별이 아닌 실존적 주체로 보이도록 만들었고요.
작가는 드로잉, 판화, 책, 조각에 이르는 광범위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위해 종이를 사용했지만, 종이를 주재료로 한 작품들도 많습니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종이 작품은 파격적이었다고 해요. 쉽게 찢기고 망가진다는 이유로 종이를 작품의 재료로 즐겨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 특성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체 피부와 잘 맞는다고 여겨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폄하되고 등한시되었던 종이를, 사회에서 주변화되어 버려지는 여성에 비유하거나, 연약함과 취약함을 가진 인간(인체)으로 묘사하죠. 종이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본 종이풍선 영향이 컸다고 하는데, 내부가 텅 비어 껍데기만 남은 듯한 풍선은 영혼과 분리되 피부만 남은 육체를 시각화하는 데 영감을 줬고, 조금 더 발전시켜 파피에 마셰(papier-mache, 종이에 풀 반죽을 섞어 되직하게 만든 후 굳히는 반죽 기법)로 조각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위 작품들은 주로 네팔산 종이를 사용했어요. 인터뷰를 보니 한국의 한지와 온돌에서도 영향을 받았다는데 아쉽게도, 아직 한지를 주재료로 한 작품은 없는 듯합니다.
작가는 판화와 사진 매체를 접하면서부터 자신을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시킵니다. 시기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인데, 이때부터 작가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어요. 특히 전시에 소개된 판화는 뉴욕 소재의 판화 스튜디오인 ULAE(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와 작업한 작품들로, 이곳은 세실리 브라운, 척 클로즈, 짐 다인, 샘 프란시스, 제스퍼 존스, 사이 톰블리, 바넬 뉴먼,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어마어마한 작가들과 협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나 작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들만 작업이 가능한 곳이죠. 그렇게 선택된 키키 스미스가 1989년부터 ULAE와 만든 첫 작품부터 대표작까지 몇 작품은 전시실에서 확인 가능하고요, 그동안 어떤 작업을 같이 했는지는 ULAE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및 에디션 구매도 가능합니다.
12점의 판화로 구성된 <밴시 펄스 Banshee Pealrs>는 작가가 작품에 직접 등장한 첫 사례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제작 당시 사진, 머리카락 등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 사용되었고, 스스로를 공포스럽고 망가진 모습으로 연출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밴시 펄스'란 제목은 아일랜드 게일 민담 속 고대 여성 정령인 '밴시'에서 착안한 것으로, 밴시가 높은 소리로 울부짖으면 곧 가족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해요. 그렇게 밴시는 곧 '죽음'의 상징인데, 아버지가 10대의 키키 스미스를 즐겨 부르던 애칭도 밴시였다고 하죠.
<꿈>은 가까이서 보면 작업의 깊이가 더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제작을 위해 그는 동판 위에 직접 올라가 몸을 웅크리고 ULA E의 판화가들에게 자신의 신체 윤곽선을 따라 그릴 것을 요청합니다. 이 자세는 키키 스미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가까이서 보면 에칭 특유의 날카로운 선으로 근육의 결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꼭 ~ 가까이서 자세히 보세요.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작품의 소재로 자주 사용한 새, 고양이, 별똥별 도상과 함께 알, 개구리, 박쥐 등 처음 등장하는 도상들로 만든 오브제도 출품되었어요. 처음엔 기괴하게 생긴 것들이 많아서 좀 꺼림직했는데 나름 귀여운 것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특히, 고양이나 문어를 혼합한 형태의 <옥토 푸시>나 눈동자가 너무 또렷하게 각인되는 <삼백안> 같은 작품은 뭔가 으스스한데 갖고 싶긴 하더라고요. 달걀노른자도 ㅎ 어쨌든 다른 데서 보기 어려우니 유심히 관찰해 보기 바랍니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한 <자유낙하>는 떨어지는 듯한 여성(작가)의 모습을 판화로 찍어낸 작품입니다. 작가는 아코디언 형태의 책들에서 영감을 받아 종종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책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 역시 원래는 접어서 손에 잡히는 책 형태로 만든 일종의 아티스트 북입니다. 그의 자화상이자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보여주는 선언문 같은 작품인데,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94년, 그는 뉴욕의 저명한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당시 그곳에 소속된 다른 선배 예술가들을 보며, 그들이 그동안 해온 수십 년의 '자유낙하'를 견디어 온 그 믿음과 마음가짐에 감명을 받습니다. 자신 역시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든 작품이 바로 <자유낙하> 예요. 그는, 예술을 그냥 선언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고, 그 이후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여겼죠. 그래서 그런지, 작품 속 떨어지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두려움과 공포심보다는 뭔가 결심을 한 듯, 이후의 장면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아는 듯 편안하게 유영하고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소화계>는 혀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장관 전체를 주철로 제작한 초기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전체 길이가 157.5cm인데 실제 우리 혀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길이가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어요.(아는 분이 계시다면 댓글을~).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물이나 감옥을 떠올렸다는데, 벽에 설치된 모습을 마주하고 난 뒤부터는 난방 기구인 라디에이터와 형태적으로도,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기능면에서도 닮았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시각적 이미지가 대상의 기능이나 역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는 1985년에 동생 베아트리스와 함께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습니다. 그 이전부터 『그레이 아나토미』를 통해 신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당시 신체에 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핫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동생이 관련 학위를 받고 싶어 해서 같이 다녔다고 하던데,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으며 우리 몸을 더 객관적으로 묘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 결과물로 장기의 생김새를 작품화합니다. <소화계>도 그런 계열의 작품이고요.
1990년부터는 인물의 전신상을 제작하면서 배설, 생리 등 파격적인 모습의 인물을 선보입니다. 인물의 이상화된 표현이 특징적인 기존의 조각 전통과는 거리를 둔 애브젝트 미술(ABJECT ART)로 그는 과격하고 도발적인 여성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고요. 이 당시의 작품 경향을 2층에 전시된 <무제 Ⅲ(구슬과 함께 있는 뒤집힌 몸)>에서 볼 수 있는데, 몸을 구부리고 있는 주변에 놓인 구슬들이 바로 몸에서 나온 분비물입니다. 물론, 사연을 모르고 본다면 그냥 예쁜 작품이지만요.
199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종교, 신화, 문학 속 여성을 소재로 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황홀>은 동화 작가인 샤를 페로(1628-1703)의 <빨간 모자>를 소재로 하는데, 알고 계시듯, 이 동화에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빨간 모자의 할머니와 소녀를 잡아먹은 늑대가 등장하고, 이들이 사냥꾼에 의해서 구출되는 것으로 동화가 마무리되죠. 유럽에서는 이 동화가 교육용으로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다고 하는데, "점잖고 예의 바르게 보여도 위험한 사람일 수 있다"라는 메시지는 지금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샤를 페로는 프랑스 시인, 평론가로도 활동했는데 정말 엄청난 동화 작가더라고요. 전설을 문학적으로 집성한 동화집을 펴냈는데, 그 안에는 무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 <신데렐라>, <장화 신은 고양이>, <빨간 모자> 등이 수록되어 있고, 약 400여 년 전의 저작물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거니, 정말 '공전의 히트'라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봅니다. 어쨌든, 그렇게 <빨간 모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동화는 작가의 작품 속에 자주 차용되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관람자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여러 이야기를 겹쳐 둡니다.
<황홀>에 늑대 배를 가르고 나오는 여성이 등장하지만, <빨간 모자> 속 여린 소녀의 모습은 아니고, 오히려 전사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죠. 이 작품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리게도 하고, 친구 쥬느비에브 까디유의 몸을 실물 크기로 본떠 만들었기에, 그가 비슷한 시기에 자주 다뤘던 도상인 파리 수호성인 쥬느비에브(늘 늑대와 함께 다녔다네요)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탄생> 역시 로마 신화 속 달과 사냥의 여신이 다이애나를 연상시키고요. 동화 속의 여리고 착한 모습이 아닌 당당하고 주체적인, 생명력을 지닌 여성상이죠.
2층 전시 작품은 1층에 비해 조금 더 화사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창조와 우주 신화에 관심을 두고, 구약성서나 고대 신화, 켈트족의 민속 신화, 이집트의 우주론 등에서 착안한 여성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거든요. 태피스트리가 특히 그런데, 벽을 감싸는 담요였던 태피스트리를, 작가는 작품이 공간을 감싸는 용도로 활용하고 싶었고, 관람객과 세상 사이에 쿠션을 만들어주는 완충재로 생각했어요. 30여 년 전 프랑스 앙제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15세기에 제작된 요한 묵시록 태피스트리와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 뤼르사의 <세계의 노래>(1968)를 보고 태피스트리에 매료되었다는데, 그 후 2012년부터 2017년 사이에 매그놀리아 에디션이라는 스튜디오와 협업하여 태피스트리 연작을 선보입니다. 여기도 엄청난 작가들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한국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로는 알렉스 카츠가 있습니다. 태피스트리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작가는 다양한 수작업 기법으로 거대한 드로잉을 제작하고 이를 스캔하여 파일을 전송, 이후 여러 번 수정을 거쳐 나온 최종본을 자카드 직기로 직조합니다. 그 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금박을 박은 것들이 있는데, 실제로 보면 작품 칼라가 더 오묘합니다.
<푸른 소녀>는 성모 마리아를 소녀상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1994년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할 때 예루살렘 시내에서 마주친 소녀를 실물 크기로 본떠 <붕대를 감은 소녀>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이후 동일 캐스트를 활용해서 성모마리아를 소녀로 표현했어요. 아무리 봐도 어떻게 성모 마리아지? 싶은데, 두 팔을 곧게 뻗은 자세는 성모 마리아의 전통적인 제스처로, 기도, 경외, 축복을 의미한다고 하죠.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별이 아닌가~ 싶은데, 불가사리예요. 무엇이든 상상이상을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도들이 돋보이는 전시인데, 마스크를 써서 잘 맡아지진 않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향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고, 이 전시를 계기로 작가에 관한 책도 열화당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 발간되었습니다. 이 자료들과 기존 발간 도록들은 3층 아트숍에서 만날 수 있으니 한번 둘러보면 좋고요. 또, 미술관 1층에는 작가 다큐멘터리 영상(러닝타임 52분)도 재생되는데, 이 영상만 봐도 작가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길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시겠지만, 보다 보면 보게 되더라고요 ㅎ 전시 출품작도 많이 나와 반갑기도 하고요. 이왕 시간 내서 가는 거, 하나라도 더 보고 오면 좋잖아요.
올해도 기대되는 전시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전시는 4월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에드워드 호퍼>입니다! 4월! 생각보다 빨리 오겠죠?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