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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SEMA(~08.20)

전시 이야기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SEMA(~2023.08.20)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대했던 전시가 지금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관에서 진행 중입니다. 요즘은 볼 만한 전시가 많아서 어디든 가기만 하면 대부분 만족스럽지만,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대규모 전시는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국내 첫 전시니. 비록 제가 고대했던 작품들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보는 재미가 있는 전시이기도 하고 전시 기간도 기니, 꼭 챙겨보길 바랍니다.    

이미지 출처: 인터파크 티켓, https://whitney.org/collection/works/38986 , 네버레스홀리다

많은 분들이 이미 보셨고 또 볼 예정인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작가의 한국 첫 회고전입니다. 휘트니미술관은 1968년에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2,500여 점과 작품 관련 정보를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아내인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로부터 기증받았고, 2017년에 아서 R. 산본 호퍼 컬렉션 트러스트가 보유한 4,000여 점의 아카이브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호퍼와 관련된 독보적인 연구 자산을 가지고 있죠. 이번 전시에 출품된 드로잉, 판화, 유화, 수채화 등 160여 점과 산본 호퍼 아카이브(Sanborn Hopper Archive) 자료 110여 점은,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지역, 케이프코드 등 전체 8개 섹션(리플릿 기준)으로 나뉘어 그의 65년에 이르는 화업을 돌아보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전시 제목 '길 위에서’는 "호퍼가 방문한 네 개의 지역으로 향하는 길이자, 그곳에서 그가 독자적인 예술을 성숙시켜 가는 여정, 나아가 그 길 위에서 우리가 호퍼를 만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호퍼 그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할 땐 대부분 현대인의 '고독', '외로움'을 키워드로 풀어가는데, 아마도 일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호퍼의 그림 속에  군중보다는 개인이, 채움보다는 비움이, 풍부한 표정보다는 무표정이, 마주 봄 보다 살짝 어긋난 시선이, 동적인물보다는 정적 인물들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겠죠. 저는 이번 전시를 개막즈음에 한 번,  전시 오픈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한 번 이렇게 두 번 봤는데, 처음엔 대중이 평하는 관점에서, 후에는 제 개인적인 관점으로 봤어요. 사실 저는 호퍼 그림 속 대상들이 그렇게 외롭거나 쓸쓸해 보이지 않거든요. 외로움이나 고독보다는 순간적인 몰입에 빠진 인물들을 그렸다고 느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감상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정답은 없으니 선입견 없이 스스로가 느끼는 대로 자유로운 관람을 하기 바라며, 8개 섹션에서 꼭 눈여겨봤으면 하는 작품을 꼽아드릴게요.   


첫 번째 섹션 '에드워드 호퍼'에서는, 1882년 뉴욕주 나이액에서 태어나 그림과 문학을 즐기며 학생 때부터 예술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화상과 드로잉을 소개합니다. 작품 구성이 아주 다양하진 않지만 1900년부터 1949년까지의 작품이 있어 화풍이 변화해 온 과정을 살짝 엿볼 수 있어요. 드로잉 작품을 눈여겨봐야 하지만,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을 제일 많이 받은 작품은 전시 초입에 배치된 호퍼의 자화상이죠.

<자화상>(1925-1930), <계단>(1949) 이미지 출처: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152

평소 애용하던 중절모를 쓴 이 <자화상>은, 화가로서 전성기에 접어든 시기에 그린 유일한 유화 자화상입니다. 완전 정면 구도가 아니라 부담 없이 시선이 마주치고, 표정 역시 약간의 미소가 느껴져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세로 64.5cm 가로 51.8cm의 그렇게 크지 않은 그림임에도 잘 찍힌 스냅사진처럼 묘하게 시선을 잡아둡니다. 색 톤도 좋고 복도처럼 보이는 뒷 배경의 벽과 문, 바닥이 직선과 사선으로 처리되어, 공간감과 함께  소소한 동세도 느껴지고요. 호퍼 섹션의 가장 후기작인 <계단>은, 창문, 현관문 등의 소재와 함께 안과 밖을 경계 짓고 관찰자의 시선을 이동시키며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숲은 종종 문명의 대척점으로 해석된다는데, 저는 그냥 당시에 그 모습과 구도가 보기 좋고 마음에 들어서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무엇보다 안과 밖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열린 문이 인상적인 <계단>은, 인공에서 자연, 내려감과 올라감, 직선 사이 곡선에 대한 생각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관람객 시야에 잡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열린 문 안팎에 사람이 없다는 것도 특징적이고요. 만약에 누군가가 화면 밖에 있었다면, 실내 계단에 앉아 문밖의 자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두 번째 섹션 '파리'에서는, 생계를 위해 1906년 뉴욕에서 삽화가로 일을 시작한 호퍼가 도시화로 나날이 달라져가는 뉴욕을 벗어나 옛 모습을 간직한 파리의 매력에 빠져 세 번 파리를 방문하며 그린 변화된 화풍의 작품들을 보여줍니다. 호퍼는 첫 해외 여행지인 파리에 10개월간 머무르면서 파리와 근교의 자연, 건축물, 사람들을 관찰하고 주변 유럽 도시를 여행하며 거장들의 작품을 관람해요. 방문 첫해인 1906년에는 건물 내부와 주변 도시 풍경을 고동색과 짙은 회색 등의 어두운 색조로 표현한 작품이 많았지만, 빛의 효과를 강조하는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받아 1907년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야외에서 작업하며 밝은 톤, 빠른 붓 터치, 부드러운 빛이 깃든 작품들과 소재의 확장, 수평 구도, 캔버스의 크기 등 전반적인 화풍의 변화가 나타나죠. 1909년의 작업에서는 센강변의 강둑, 루브르박물관, 다리와 같은 건축적 요소와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부각되는데, 이 섹션의 작품을 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색이 밝아지고 있구나", "빛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구나", "다양한 사람을 관찰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푸른 저녁〉 (1914),<밤의 그림자>(1921),<비스트로 또는 와인 가게>(1909) 이미지 출처: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

 〈비스트로 또는 와인 가게〉(1909)는 호퍼가 파리여행에서 돌아와 파리를 회상하며 그린 작품으로, 실제 풍경에 작가의 상상력이 반영되었다고 해요. 실제의 장소와 주관적으로 내가 본 장소가 겹쳐진 거죠. 장소의 분위기는 살리되 자신의 정서적 터치를 더한 이 작품은 호퍼의 독자적 예술성의 토대가 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푸른 저녁〉(1914)은  파리의 카페를 배경으로 왼쪽의 노동자, 중앙의 광대와 매춘부,  담배 피우는 예술가, 오른편의 부르주아 남녀 등 다양한 인물상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마지막 파리 방문 이후 4년이 지나  뉴욕에서 완성한 작품입니다. 인물들의 단절적 관계와 심리적 풍경 묘사라는 그의 성숙기 회화의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 실제 풍경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구성으로 그려진 초기 회화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죠. 하지만 당시  미국 내에서는 파리가 아닌 뉴욕의 풍경을 원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서, 1915년 뉴욕 맥도웰클럽에 이 작품이 출품됐을 땐 혹평을 받기도 했대요.  후에 호퍼도 이 시류에 합류했고, 뉴욕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미국적 풍경을 담기 시작하죠. 


세 번째 섹션 '뉴욕'에서는, 1908년부터 1967년까지 호퍼가 뉴욕에서 생활하며 그린 뉴욕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나이액과 뉴욕을 잇는 페리와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던 그는, 화려한 도시 풍경보다 평범한 일상을, 마천루의 수직성보다는 수평 구도 관심이 많았다고 해요. 또 1930년대까지 뉴욕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던 EL(elevated train) 고가 전철 안에서 창문을 통해 주변을 바라보는 걸 즐기다 보니, 그 과정에서 마주한 풍경들과 교통수단 안팎에서 바라봤던 장면들, 뉴욕의 고층빌딩 사이에 자리한 공원, 건축물의 지붕, 다리 등이 색다른 구도로 그의 작품 속에 자리 잡게 되었죠. 호퍼 그림 속 건축물은 꼭 생명력을 지닌 대상 같아서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데, 화면에 인물이 드러나지 않는 건축물일수록 그런 느낌이 더 강하더라고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1941/1942),<밤의 창문>(1928),<맨해튼 다리>(1925-1926), <통로의 두 사람>(1927), <도시의 지붕들>(1932)

이미지출처: 휘트니,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audio_guide?exNo=1152724&audioGuideNo=1167261&photosketchNo=126005¤tPage=1&glolangType=KOR#exAudioGuideArea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출품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콩테와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로 왔는데,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맞은편에 흥미로운 유화작품들이 많다 보니 자세히 보지 않고 스치듯 보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대신, 조세핀의 기록을 함께 볼 수 있게 해 두어 단편적이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어요. 조세핀의 기록은 호퍼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하는데, 호퍼 부부는 작품을 완성한 후 장부에 작은 스케치와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 판매가, 커미션 비용, 구입자, 수상경력 등의 정보를 기록합니다. 


또, 극장, 레스토랑, 사무실, 호텔, 집 등의 장소를 창문을 통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대부분 실내는 더 밝게, 실외는 더 어둡게 표현해 극적인 대비를 이뤘죠. 전체 얼굴이나 표정을 식별하기 힘든  뒷모습이나 측면의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특징이고요. 연극을 좋아한 호퍼와 조세핀은 1925년부터 1936년까지 약 100편 이상의 연극을 함께 관람하고 공연티켓을 보관합니다. 호퍼의 작품 속 여성 모델은 대부분 그의 아내로,  1915년 극단 워싱턴 스퀘어 플레이어스(Washington Square Players)에서 아마추어 배우로 활동하기도 한 조세핀은 다양한 포즈를 호퍼에게 제안했다고 해요. 그럼에도 매 작품마다 다른 인물로 변주가 가능했던 건, 그때그때 작품에 맞는 여성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려넣어서이고요. 


 네 번째 섹션 '길 위에서'에는, 단 한 점의 작품만 있습니다. 바로, 신호탑 뒤로 강렬한 색을 뿜어내는 일몰의 향연을 그린 <철길의 석양>이죠. 이 작품은 속 풍경은 100% 실재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풍경으로, 호퍼 부부는 이즈음 뉴욕에서부터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까지 함께 여행을 다녔다고 해요. 여정 중 길 위에서 얻은 인상들을 작품의 영감으로 사용했다는데, 실제로 가보지 않아 이 장소의 석양은 어떻게 달랐는지는 알 수없지만, 가보진 않았어도 어디선가 한번 정도는 만났던 것 같은, 그런 사실적인 일몰이긴 해요.  

<철길의 석양>(1929), 캔버스에 유채, 74.5cm x 122.2cm 이미지 출처: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

그래서, 상상이 더해진 풍경이라고는 해도 현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라 여겨지는데, 뭐 그럴 순 있겠죠, 당일에 석양은 조금 더 붉은빛이었거나 더 짙은 자줏빛으로 어두웠는데, 그보다는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잔잔하게 표현했거나, 구름이 조금 더 타원형이었는데 산(언덕)의 실루엣과 대비되는 직선으로 그렸다던가. 저는 초록 계열의 산(언덕)이 사실 언덕이라기보다는 높이 치솟은 파도 같아 보였는데, 그렇게 격정적인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하늘이 너무 고요해 보이긴 하네요. 호퍼 부부는 1925년 기차로 미국을 횡단하고, 1927년 중고 자동차를 구입한 뒤로 미국 서부, 멕시코 등을 평생에 걸쳐 여행하며 작품들을 꽤 많이 남깁니다.


다섯 번째 섹션 '뉴잉글랜드'에서는, 1912년부터 1919년까지 뉴잉글랜드 해안선을 따라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를 여행하며 그린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땐 기존 작업 방식을 벗어나 여러 시도를 하는데, 1914년과 1915년에는 3마일에 이르는 모래 해안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촌인 메인주의 오건킷을, 1916년부터 1919년에는 메인주의 해안선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바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몬헤건섬을 4번 방문하며 밑그림 없이 현장에서 즉흥적인 작업을 해요. 이 시기의 작품은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을 통해 표현한 암석의 덩어리감이 두드러집니다. 호퍼는 어렸을 때 강에서 혼자 배를 타는 걸 즐겼고, 그런 이유로 호퍼 그림엔 배가 자주 등장합니다. 

<안개 속의 메인>(1926-1929),<작은 배들, 오건킷>(1914),<오건킷의 바다>(1914), <오건킷의 작은 만>(1914), <석회암 채석장>(1926) 출처:sema

호퍼는 1923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글로스터에서 동문이자 작가인 조세핀 버스틸 니비슨과 교제를 시작했고, 1924년 결혼을 합니다. 앞에서 계속 얘기한 호퍼의 부인이죠. 조세핀은 원래 호퍼보다 더 알려진 작가였어요. 당시 호퍼의 색톤은 전반적으로 어두웠는데, 조세핀의 영향으로 야외 수채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색이 밝아집니다. 특히 이 시기에 작업한 호퍼의 수채화는 화단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판매로까지 이어지며 전업 화가로 진입하는 본격적인 기회를 마련해 줬고요. 이번 전시에 풀춤된 오건킷을 그린 그림들은 1915년부터 1920년 사이 뉴욕 맥도웰클럽 전시 이후 한 번도 소개되지 않다가 휘트니에 소장된 이후부터 전시에 나왔다고 해요. 드물게 출품된 작품들이니 이번 기회에 꼼꼼하게 봐두면 좋겠죠. 


여섯 번째 섹션 '케이프 코드(Cape Cod)'에서는,  호퍼의 제2의 고향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보여줍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매력에 빠진 호퍼 부부는 1930년 6월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 반도 남쪽에 위치한 트루로에 방문해, 우체국장이었던 벌리 콥(A.B. Burleigh Cobb)에게 작은 집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냅니다. 이 집이 너무 마음에 든 호퍼 부부는 세 차례 콥의 집을 더 방문했죠. 이 지역은 주민이 500명 남짓한 작은 마을로,  호퍼에겐 뉴욕에서 벗어나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완벽한 장소였어요. 1934년 트루로에 스튜디오 겸 집을 마련한 뒤, 부부는 매년 여름과 초가을을 케이프코드에서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합니다. 30 여 년간 매해 이 지역을 방문하죠.

(왼)오바마 집무실(2014)(오)<벌리 콥의 집,사우스트루로>(1930-33) 이미지 출처: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sema

전시에 출품된 <벌리 콥의 집, 사우스트루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4년 대여해 백악관 집무실에 건 그림으로도 유명합니다. 같은 제목의 두 작품 중 아래 작품은 약 97억 원(722만 8500달러(수수료 포함))에 소더비 현대미술 이브닝 경매에서 팔렸고, 위 작품이 현재  서울에 전시 중이죠. 당시 수증된 작품을 휘트니미술관이 경매에 출품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는 판매수익으로 새 소장품을 구매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해요.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오전 7시>(1948) 이미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sema) 누리집

조세핀의 기록에 따르면 <오전 7시>(1948)의 배경은 실제 나이액 소재의 주류 밀매소라고 해요. 금주령이 해지된 지 15년 후인 1948년에 케이프코드의 트루로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의 1930년 이후 작품이 그렇듯이 기억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으로 재탄생해, 기록이 없었다면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직관적으로 가늠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특정 시간을 제목으로 할 만큼 그가 천착했던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 집중해서 보면 좋을 작품입니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도 제목에서 드러나듯 햇빛의 표현에 중점을 둔 작품인데, "노란색 안료가 들어가지 않은 하얀색으로 햇빛을 그리려고 시도했다"라고 하니 감상할 때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세요. 


일곱 번째 섹션 '조세핀 호퍼'에서는, 조력자로서의 조세핀 니비슨 호퍼를 짚어봅니다. 그는 호퍼를 만나기 전부터  촉망받는 예술가였어요. 1905년 뉴욕예술학교에 등록하여 로버트 헨라이의 수업을 수강하고, 1914년에는 스튜어트 데이비스, 찰스 데무스, 찰스 버치필드 등 미국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그룹전을 가질 정도였죠. 조세핀이 없었다면 오늘날 에드워드 호퍼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녀는 호퍼에게 아내이자 뮤즈, 매니저, 그의 화풍에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 그리고 기록자로서의 멀티 역할을 수행합니다. 1924년 부부가 된 둘은 성격 차로 다툼이 잦았음에도, 문학, 영화, 연극, 프랑스에 대한 애정 등 취향을 공유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으로 여행을 떠나 함께 야외 작업을 즐깁니다. 호퍼의 전시 이력, 작품 판매 등 상세한 정보가 적힌 장부 관리를 30년 이상 조세핀이 지속하지 않았다면  말수가 적은 편이던 호퍼가 언급하지 않았던 작품의 세부 사항들을 지금 우리가 이해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덕분에 그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대중에게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니, 호퍼에게 조세핀은 귀인 중의 귀인이죠. 부부로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햇빛 속의 여인>(1961) , 포토존, 레저북 이미지 촬영: 네버리스홀리다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용된 유화 <햇빛 속의 여인> 속 여인도 조세핀입니다. 당시 78세의 그녀를 호퍼는 실재의 모습보다 작가의  생각과 정서에 기반해서 묘사했죠. 3층 포토존 배경으로 쓰인 작품으로, 최대한 커튼 쪽에 끝을 맞춰 찍어야 원작에 가깝게 찍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도 조세핀의 기록에서 감상 포인트를 찾을 수 있는데, "태양이 더 높게 뜸에 따라 햇빛의 경계도 함께 올라갈 듯 그려진 것을 주목할 것"이라 적혀있으니, 빛의 묘사가 어떤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면 좋겠죠. 


여덟 번째 섹션 '호퍼의 삶과 업'에서는,  작가의 예술과 삶의 행적을 볼 수 있는 사진, 일러스트, 다큐멘터리 영화 등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퍼가 화가로 본격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20여 년간(1906-1925) 뉴욕 광고회사의 프리랜서 삽화가로 일하며 제작해 온 각종 광고 삽화, 잡지 표지 디자인, 출판물 삽화가 꽤 인상적이고, 함께 관람 후 모은 극장표, 4권의 장부도 재밌었어요. 장부 내용은 영상 화면 속에 재생되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내용을 다 보진 못했지만, 뭔가 영업 기밀을 공유받는 것처럼 흥미롭더라고요. 

1층 <아카이브 자료들> 사진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이번 전시는 전관을 다 사용하고 있지만, 전시 동선이 2층에서 시작해 3층을 보고 마지막에 1층을 보도록 구성되었어요. 사람들이 몰릴 것을 대비해 30분 간격으로 관람객을 입장시키고 있고, 입장권은 다시 손목 팔찌로 교환을 해야 전시를 볼 수 있습니다. 도슨트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지만 배우 유지태의 목소리로 듣는 오디오 가이드(유료)도 있으니, 천천히 여유롭게 보고 싶다면 오디오 가이드를 추천드려요.  2,3 층은 3층 포토존을 제외하곤 사진촬영 불가고, 1층은 촬영이 가능합니다.  대신, 전시 브로셔가 잘되어있고, 홈페이지 설명도 충실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죠. 제 글도 브로셔 소개글을 참고해서 작성했고요. 1층은 유화 대 한 점을 제외하면 드로잉, 일러스트, 잡지 등으로 꾸며진  아카이브실로, 94분에 이르는 <호퍼 : 아메리칸 러브스토리>(2022)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 중인데, 영상 재생 시간이 짧진 않지만 국내에선 보기 어려운 다큐멘터리이니 꼭 끝까지 보길 권해드려요. 6월 중에는 전시 연계 강의도 진행되는데, 김봉중, 양정무, 유현준 등 강사진이 화려하니 자세한 건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해 보세요. 


아, 제 예전 글 <첫눈에 끌린 뮤직비디오>에 에드워드 호퍼 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 있으니 참고해 보시고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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