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윌리엄 클라인-DEAR FOLKS,》 뮤지엄한미 삼청, (2023.5.24~9.17)
일찍 시작된 장마와 함께 '눅눅함'과 '축축함'을 자주 체감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햇살이 방긋할 때면 바로 튀어나가 몇 분이라도 거닐게 되더라고요. 비 오고 바람 부는 궂은날에도 내리는 비를 쫄딱 맞아가며 서울둘레길을 몇 번 걸은 후, 비 오는 날 하는 야외 활동도 충분히 매력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맑은 날보다는 여러모로 챙겨야 할 게 많아서 행동반경이 줄어들긴 하잖아요. 아! 저 완주했습니다 156.5km 서울둘레길! 완주증도 받았고요. 훗 :) 7,8월은 장마와 폭염을 핑계로 좀 쉬고 9월부터 다시 걷을 예정입니다. 그동안 미뤄뒀던 것들도 많아 두 달 동안 바짝 해야 하기도 하고, 포스팅도 좀 자주 하자~하는 생각도 있고요.
어쨌든 장마와 폭염을 이유로 늘어지지 말고 계획대로 착착 진행하다 보면 곧 오겠죠, 가을.
오늘 소개할 전시는,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진행 중인 《윌리엄 클라인 - DEAR FOLKS,》입니다. 뮤지엄한미는 가현문화재단이 개관한 국내 최초 사진 전문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의 새 이름입니다. 원 소재지인 방이동과 새로 개관한 삼청 본관 및 별관을 구분하기 위해 '뮤지엄한미 삼청', '뮤지엄한미 방이'로 부르죠. 뮤지엄한미는 2003년 개관 이래로 쭉 전시、소장품 수집、작가 지원、출판 및 교육사업 등을 진행 중이고, 2009년 한국사진문화연구소를 설립해 사진 도입 초기부터 1900년대의 자료수집과 연구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2012년엔 한미사진아카데미도 개원해 사진예술 대중화에도 기여하고 있으니,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곳으로 기억해 둘 만하죠.
작년 12월, 삼청 본관 개관전으로 한국사진사를 되돌아보는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를 개최했어요. 이 전시는 기록에 남아있는 첫 사진 개인전인 정해창의 《예술사진 개인전람회》가 열렸던 1929년을 기점으로, 사진작가로 처음 미술관에서 전시했던 1982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석조전 서관의 《임응식 회고전》까지, '초기부터 한국 미술계에 사진이 정식 장르로 편입된 것으로 평가되는 해까지의 사진사'를 다뤘죠. 개관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볼거리가 풍성했습니다.
개관전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 중인 《윌리엄 클라인 - DEAR FOLKS,》는, 2022년 세상을 떠난 현대사진의 거장 윌리엄 클라인(Willian Klein,1926-2022, 미국)의 회고전입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유럽의 매력에 빠졌고, 전쟁 후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겨 화가 페르낭 레제르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 등 여러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며 감각을 키워갑니다. 건축가의 꿈을 갖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포커 게임에서 이겨 독일제 롤라이 플렉스 카메라를 손에 넣은 뒤 사진에 매료됐다고 하던데, 일생동안 화가、패션사진작가、그래픽디자이너、책 편집자、다큐멘터리 및 영화제작자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온 만큼, 작업 영역의 스펙트럼이 참 넓어요. 게다가 이 전시는 2015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무려 7년간 준비한 해외 기획전으로, 작년 9월 작가가 96세로 파리에서 별세하면서 그의 첫 유고전이라는 타이틀도 갖게 되었죠.
전시는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의 회화,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을 총 8개의 섹션으로 나눠 전방위 예술가인 클라인의 면모를 잘 볼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1950년대 초기 회화부터 회화와 사진,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을 교차시킨 포토그램인 '황홀한 추상', 야외에서 카메라로 촬영한 첫 사진작업인 ‘흑백의 몬드리안’, 현대사진의 도화선이 된 ‘뉴욕’과 도시 거리사진과 사진집 섹션인 ‘도시의 사진집’, 1960년대 문자와 추상을 결합한 ‘레트리즘 회화’, 1955년 『보그』와의 협업으로 시작한 ‘패션’ 사진, 1990년대 밀착 프린트 위에 색을 칠한 ‘페인티드 콘택트’, 다큐멘터리 영화와 장편 극영화(일부 상영)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까지, 각 섹션에 속한 작품들은 뚜렷하게 구분되며 그의 작업 세계 전반을 보여주고 있죠. 1층에서 시작해 지하 1층까지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관람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첫 번째 섹션인 '황홀한 추상'에선 1952년의 추상 사진작업인 포토그램이 주를 이룹니다. '카메라를 쓰지 않고 암실에서 인화지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빛을 쪼이는' 실험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포토그램은, 기하학적 이미지의 추상 사진으로, 회화성이 강해 저는 처음에 이 작품들이 사진이 아닌 줄 알았어요. 물론 회화 작품들이 섞여 있어 더 그랬지만요. 클라인은 1947년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겨 미니멀리스트이자 색면추상화가인 엘즈워스 켈리를 만났고, 막스 빌, 라슬로 모홀리 나기 등 당대 예술가들의 작품과 글에 관심을 가지며 영향을 받습니다.
"뉴욕의 행위 미술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붓놀림을 스스로 금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을 평면 캔버스 위에 최소한의 형태로, 이것이 우리의 좌우명이었다."
1950년에는 페르낭 레제의 아틀리에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고요. 또, 밀라노 전시를 하며 만난 이탈리아 건축가들과 협업하면서 대형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흑백으로 칠한 패널을 조립한 회전식 칸막이였다고 해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설치작 <Moing Diamomds on Turning Penels>이 1952년 작품을 2023년에 복제한 작품(replica)입니다. 모터가 장착되어 패널이 움직여요.
두 번째 섹션인 ‘흑백의 몬드리안’에선 카메라로 촬영한 첫 야외 사진 작업을 선보입니다. 클라인은 1952년 네덜란드의 발헤렌 섬을 방문하는데, 이 섬은 추상미술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이 자주 방문한 장소였다고 해요. 이곳에 머물면서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이미지를 촬영한 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한 작품이 〈Mondrain Barns〉연작이죠.
이 작품들 맞은편은 1층 개방수장고로, 뮤지엄한미 소장품 중 클라인이 생전에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1903~1975)의 사진 작품 20여 점이 전시 중입니다. 그는 군입대 전까지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을 드나들며 사진과 회화,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하며 안목을 길렀고, 청년 시절엔 인상파와 세잔, 피카소를, 사진 분야에서는 농업안정국(FSA) 사진들과 루이스 하인(Lewis Hine, 1874~1940), 특히 워커 에반스의 직설적인 도큐먼트를 좋아했다고 해요. 클라인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에반스가 있어서 살짝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이유였더라고요.
세 번째 섹션인 '뉴욕'에선 1954년 『보그』의 아트디렉터인 리버만의 초청을 받아 뉴욕에 머물며 찍은 1954~1955년의 작품들을 보여줍니다. 유럽에서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사진 작업이 본격화된 시기로, 전통적인 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뉴요커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직접 접촉하며 담아냈죠.
"사진의 영도, 가장 날것의 스냅숏을 찍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민족지학자(anthropologist)라고 여기고,
마치 인류학자가 줄루족(Zulus)을 대하듯 뉴요커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미학적 기준은 뉴욕 데일리 뉴스 신문이었다.
인정사정없는 레이아웃과 요란한 헤드라인으로 난폭하고 무례하며 거칠고 잉크가 번져 있는
타블로이드 같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으며, 이런 책이야 말로 뉴욕에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파격적인 뉴욕 사진은 쇠이유 컬렉션의 디렉터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르케스(1921-2012)의 도움과 프랑스의 한 출판사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레이아웃 디자인부터 사실적인 텍스트까지 클라인이 모든 것을 직접 구상하고 구현한 사진집 『Life is good & Good for you in New York : Trance Witness Revels』는 오늘날까지도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고 해요. 그를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집이기도 하고요.
네 번째 섹션인 '도시의 사진집'에선 1956년부터 2000년까지 로마、모스크바、파리、도쿄에서 찍은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에서 동시에 출간된 뉴욕 사진집의 성공으로 그는 다른 도시의 사진집도 출간하게 되는데, 로마는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 감독의 초청으로 영화 촬영장에서 일하기 위해, 1959년엔 모스크바를, 1961년에는 일본을 출판사 초청으로 방문했어요. 이 시기 그가 찍은 다양한 피사체들이 뿜어내는 조형적 매력은 그를 당대 가장 저명한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다섯 번째 섹션인 '레트리즘 회화'에선 문자와 추상이 결합된 1960년대 회화작품을 선보입니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마주 보는 벽에 설치되어 앞서 설명한 '도시의 사진집'보다 먼저 만나게 되죠. 텍스트의 의미보다는 문자의 조형성에 주안점을 둔 이 작품은, 194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이스도르 이주(Isidore Isou, 1925-2007)의 주창으로 시작된 문학운동인 레트리즘(lettrism, 문자주의)을 보여주는 개념미술작업입니다.
여섯 번째 섹션인 '패션'에선 기성복의 등장과 패션의 산업화로 패션 관련 유명 잡지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사회적 이슈와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 사진을 찍은 그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클라인은 1955년부터 1965년까지 10년간 『보그』와 협업하며 패션 사진들을 찍었는데, 당시 유명 패션 잡지의 아트 디렉터들은 전쟁 전 유럽의 아방가르드 교육을 받았던 이들로, 그들의 예술적 성향에 힘입어 이 매체 지면에선 작가들이 상당한 수준의 창작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해요. 클라인은 처음으로 패션모델의 사진을 스튜디오 밖에서 찍는 등 거리와 패션 사진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작품을 보다 보면 패션 사진에 문외한이어도 일반적인 패션 사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특히 모델 뒤의 군중들 얼굴을 모두 지운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약간 충격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어요. 설정 자체가 연극이나 영화 같았고, 그가 표현하려던 익명성이나 외로움 등이 흑백사진이지만 화려한 모델과 배경에 전혀 묻히지 않고 드러나서요. 오리지널을 보면, 감흥이 더 큽니다.
일곱 번째 섹션인 '페인티드 콘택트'에선 회화와 영화, 사진을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한 연작 <페인티드 콘택트 painted contacts>를 소개합니다. 사진가들은 하나의 필름으로 찍은 모든 사진을 한 장에 보여주는 밀착 인화지(콘택트 시트)를 보고 빨간색 유성펜으로 O나 X를 적어 뽑을 사진을 표시하는데, 클라인은 이런 관례를 차용해 3장의 사진을 하나로 묶고 그 위에 선을 그려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었죠. 회화와 영화, 사진이 하나로 결합되기도 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던 그의 예술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맨 끝에 게재한 <Gun 1>(1954)은, 그의 대표 작업 이미지 중 하나로, 이 페인티드 콘택트는 퐁피두센터 회고전(2005)의 도록 표지와 포스터로도 사용된 이력이 있어요.
여덟 번째 섹션인 '영화'에선 1964년부터 1999년까지 촬영한 9편의 다큐멘터리와 장편 극영화 일부를 34분 26초로 편집한 영상을 보여줍니다. 회화에서 사진 그리고 영화로 확장된 그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업이죠. 클라인은 1960년대 중반 영화에 전념했고 이후 20여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장편 영화 및 극영화를 연출합니다. 장편 영화 〈Who are You, Polly Maggoo?〉로 프랑스의 독창적이고 재능 있는 영화감독에게 주어지는 장 비고 상 (Prix Jean-Vigo)을 1967년에 수상하기도 했고요.
이 전시는 전체적으로 출품작의 내실도 꽉 찼지만, 섹션 구분도 잘 되어 있어 각 소주제에 속한 작품들이 섞이지 않고 잘 보입니다. 왜, 작품을 많이 보다 보면 머릿속에서 이미지끼리 섞일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전시는 각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의 인상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곡차곡 잘 정리가 되더라고요.
집중해서 본관 전시 보고 건물 주변 한 바퀴 돌아본 후 별채까지 보고 나면 12,000의 입장료(문화가 있는 날엔 반값)와 관람을 위해 쓴 시간도 전혀 아깝지 않으니, 기간 내에 꼭 챙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