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포니의 시간 PONY the timeless 》,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 (~10.8)
얼마 전 운전면허증을 갱신했습니다. 적성검사 기간이라 온라인으로 재발급 신청을 하고 근처 경찰서에서 발급받았는데, 국제운전면허증보다 더 오래 쓸 수 있는 국영문 혼합형 운전면허증이 생겼더라고요. 아직 인정 국가가 많지 않아 모든 수교국에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앞면은 국문 뒷면에는 영문과 픽토그램으로 운전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그려진 운전면허증은 꽤 특별해 보여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더라고요. 그래서 여권 스타일로 바뀐 사진 규정에 맞춰 사진도 새로 찍고, 국영문 혼합형 면허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참고로 사진촬영비는 4만 원, 면허증 발급비용은 만 오천 원 썼어요.) 어지간하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운전할 일도 없고, 차에도 관심이 정말 없는 편인데, 이 전시를 보고 나니 운전하고 싶어졌어요, 1974년 탄생한 대한민국 첫 국산차 '포니'를요.
오늘 소개할 전시는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열리는 《포니의 시간 PONY the timeless 》입니다. 6월 오픈 당시 전시 기간은 8월까지였는데, 포니에 대한 추억이 있는 세대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어 기간도 10월로 연장되었죠. 무료 관람에 전시 관람 시간 및 기간도 길고 전시 공간도 쾌적한 데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포니 2"와 "포니 쿠페"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니 꼭 놓치지 말고 챙겨보세요.
전시는 일반 관람과 도슨트 관람으로 볼 수 있는데, 20여 분 정도 진행되는 도슨트 관람은 일찌감치 예약 마감이라 저는 일반 관람으로 별도 예약 없이 전시장을 찾아 자유롭게 봤습니다. 가보니, 일반 관람도 괜찮더라고요. 원하는 속도로 볼 수 있고, 층마다 안내하는 분들이 계셔서 궁금한 건 그때그때 물어보기도 편해요. 제가 갔던 평일 늦은 오후엔 일반인, 차 애호가, 자동차 공학 관련 학과생들 등이 찾아 전시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재밌는 건, 동반인이 있는 경우엔 대부분 "옛날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더라고요. 그만큼 추억이 많은 차가 "포니"라는 거겠죠.
<7080 시대>, <포니 아카이브>, <디자인 헤리티지>, <휴머니티> 네 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포니의 시간 PONY the timeless》의 관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서 각 층을 보고 계단으로 내려오면 됩니다. 연대순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어 반대로 보면 서사가 좀 꼬여요. 전시를 보기 전엔 그냥 차 몇 대 만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차가 하이라이트 전시 유물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볼거리가 있어 좋았어요.
전쟁과 빈곤을 겪은 한국의 1970년대는,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움직임이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때었죠. 이 당시 한국경제는 "압축성장"이라 불릴 만큼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해,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평균을 넘어 중진국 대열에 올랐고 국토와 도로, 도시 공간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가 등장하죠. <7080 시대>에서는 1970년대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문화, 문학, 경제적 관점으로 풀어줍니다.
전시장에는 당대를 이해할 수 있는 지면 자료들과 아티스트 협업 작품들이 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로 접하게 되는 영상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데뷔한 정재은 감독의 <어느 사람과 착한 어린이>입니다.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대한 뉴스(1945-1994) 중 사운드가 소실된 미공개 영상 1만여 개를 살펴보는 작업으로, 그중 '어느 사람(1962)'과 '착한 어린이(1963)' 두 편을 토대로 하고 있죠. 이 영상과 함께 흘러나오는 사운드는 전자음악가 키라라의 <1980 경음악 큰 잔치>로, 키라라가 창조한 80년대 그룹사운드의 연주 실황을 콘셉트로 "겪어보지 못한 시대의 풍경과 정취를 상상하고 이를 공간에 그려보는 시도"를 하는 작업입니다. 전시장 벽면에는 '청소년기 집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그린 정재호 작가의 '아카이브 회화' 시리즈 중 16인치 TV, 다이얼 전화기, 카세트 라디오가 등장하는 <밤의 온기>, <상자>, <아성>과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영화 포스터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꾸민 <영화 카드 아카이브>도 있어 그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죠. <영화 카드 아카이브>는 현장 종이 뽑기를 통해 당첨된 숫자에 맞는 당대 영화 포스터로 출력한 스티커도 한 장 가져올 수 있어요. 저는, 슈퍼맨 스티커를 가져왔습니다.
<7080 시대>에서 개인적으로 젤 관심이 간 작품은 이지수, 이소현, 윤충근이 2020년 결성한 공동체인 새로운 질서 그 후의 <하우 머치?>였어요. 전시장 중앙에 길게 놓인 화폐 단위와 숫자가 적힌 설치와 그 옆에 놓인 국민 총생산, 외화보유액, 수출액, 택시, 휘발유, 자장면 등의 데이터가 들어간 터치 패널은 1970-80년대 경제적 상황을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데이터로 반영된 10개 항목을 다 눌러보고 싶었지만, 체력이 떨어진 관계로 자장면 가격만 몇 번 눌러보고 왔어요. 열화당 책 박물관의 <잡지로 보는 1970-80년대>도 재밌는 제목과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저출산과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이때, "아이 셋이면 남보기 챙피하다"란 제목의 글에서 격세지감도 느꼈고요.
<포니 아카이브>에선 포니 2 픽업, 포니 왜건, 포니를 만날 수 있습니다. 1970년대는 산업이 발달하는 만큼 국산화에 대한 열망도 커졌던 시기였지만, 독자모델을 만들어 내는 게 현실적으로 쉽진 않았죠. 기술도, 비용도, 성공 가능성도 모두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졌던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모델 개발을 결심한 지 1년 만인 1974년 6월, 포니의 첫 시제품이 완성됩니다. 또, 10월에는 '포니'와 '포니 쿠페'가 나란히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올라, 세계에서 아홉 번째,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자국 브랜드 고유 모델 자동차를 가진 나라가 됐죠. 저는 포니는 알았지만, 포니 왜건이나 픽업트럭은 몰랐는데, 전시장에서 보니 정말 예쁘더라고요.
<포니 아카이브>에선 포니의 역사를 자료를 통해 보여줍니다. 포니의 탄생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전체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완성차 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짓는 것부터 분야별 해외 전문가와의 협력, 수많은 시험을 거친 성적표까지 그 노력과 과정이 담긴 자료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죠.
당시 현황을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 광고자료가 꽤 내실 있게 준비됐는데,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승용차 한 대를 부상으로 내걸고 약 5주간 공개 모집한 포니 이름 신문 광고와 포니 탄생과 제작 과정이 담긴 일기와 이 대리 노트죠. 일부 자료는 내용을 읽어볼 수 있게 복제되어 있습니다.
<디자인 헤리티지>에선 1974년 이탈리아 토니노 모터쇼에서 공개한 포니 쿠페 복원 모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포니 쿠페를 보고 스포츠카를 연상됐는데, 함께 전시된 다른 차량 디자인보다 직선과 평면이 두드러져 조금 더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포니와 포니 쿠페는 자동차 전문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뽑힌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가 디자인했는데, 그는 폭스바겐 골프, 로터스 에스프리, BMW M1, 들로리안 dmc-12 등도 그려냈죠. 이미지를 찾아보면 이들 간의 유사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30대의 젊고 열정적인 디자이너였던 조르제토 주지아로 팀과의 인연은 포니를 시작으로 15년간 이어졌다고 해요. 포니와 함께 토리노 모터쇼에 선 콘셉트 모델 '포니 쿠페'도 양산을 준비했으나 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1981년 프로젝트가 중단되었고요. 전시장에 있는 포니 쿠페는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복원된 제품으로, 이 전시를 찾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죠. 또 포니 쿠페와 함께 전시 중인 현대의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 N 비전 74와 전기차 전용 라인업의 첫 번째 모델인 아이오닉 5는, 포니와 포니 쿠퍼를 오마주 하거나 영감을 받아 디자인된 거래요. 숫자 74는 포니와 포니 쿠페가 공개된 해인 1974년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선 차량 디자인 도면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된 도면 중 하나를 미농지(트레싱지) 카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도면 전시 진열대 앞에서 보고 있으면 직원분이 먼저 다가와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는데, 혹시 다른 분 응대로 바쁘실 수 있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현장에 계신 직원분께 말씀하시고 받아오면 됩니다. 말린 게 풀리지 말라고 스티커를 붙여주시는데, 이건 잘 안 떨어져 지니 살짝 붙이세요.
<휴머니티>에선 앨범 속 포니와 자료 및 영상을 복층(1층, 2층)에서 소개합니다. 그땐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옛날 사진 속 정경이 촌스럽지 않고 정말 새로웠고, 다른 사람의 일상 기록이 정감 있고 친근하게 다가왔어요. 정주영 회장의 말도 인상적이었고요.
전시장 1층에선 관련 굿즈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도록, 엽서, 포스터, 스티커 외에도 신차 고사 미니어처, 포니 택시미터기 방향제 등을 판매하는데, 제가 가장 갖고 싶었던 포니 미니어처는 판매를 하지 않더라고요. 연도별 포니 스티커도 다 팔렸고. (갖고 싶습니다~~~ 포니랑 포니 쿠페 미니어처~~)
전시장 입출구에는 전시를 보면서 찍었던 사진을 포토카드로 인화할 수 있는 기계도 설치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이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시간이 된다면, KBS <역사저널 그날> 400회를 보고 가세요. 이 프로그램도 제가 즐겨보는데,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으로 꾸며진 시리즈 중 첫 회인 400회가 포니 탄생 이야기입니다. 살아보거나 겪어보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건 꽤 매력적인 경험이기도 하고, 일단, 재밌어요. 전 시리즈를 다 보시는 게 가장 좋고요. 안된다면 꼭 400회라도 보고 가셔서 더 풍성하게 전시를 즐기고 오길 바라겠습니다.
비가 무섭게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데, 모두 비 피해 없기 바라고요!
남은 주말도 신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