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제가 요즘 좀 걷고 있습니다. 명확히 말하면 156.5km에 달하는 서울둘레길을 걷고 있죠. 혼자는 완주할 자신이 없어 매주 토요일 그룹 걷기에 참여하고 있는데, 매주 13~18km씩 걷기 시작한 지 이제 7주 차라 완주까진 아직 멀었어요. 처음엔 걷고 와서 힘들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이젠 다음날에 볼 일을 보러 나가긴 합니다. 거리는 얼마 안 되는데, 오르락내리락 계단이 많아서 힘든 코스들이 좀 있거든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도 걷는데, 걷다 보니, 이 말이 자주 생각나더라고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
아프리카 속담, 인디언 속담, 넬슨 만델라의 말 등 여러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은, 출처가 어디든, 너무 맞는 말입니다. 서로의 속도에 맞추게 되면서 평소보다 느리게 걷긴 하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함께 있어 가게 되니까요. 걷기 크루들은 이 걷기를 통해 처음 뵈었는데, 방향성과 지향점이 같다 보니 낯섦이 오래가진 않더라고요. 이 길을 처음 걷겠다 결심했던 목표가 '호연지기를 기르자'였는데, 완주 후에 어떻게 달라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새로운 결심이 움트고 있긴 합니다. 이 길을 완주하면 인생 과제로 한국 100대 명산 정복에 도전해 보려고요 ㅎ
어쨌든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수락산을 걸어봤는데, 이 산, 아주 명물입니다.
수락산水落山은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과 함께 서울 4대 명산으로 불립니다. 해발 638m로,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서 물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해요. 수락산 남쪽에는 해발 508m의 불암산佛岩山이, 서쪽에는 해발 739.5m의 도봉산이 자리해 경관이 남다르긴 하더라고요. 제가 갔던 3월엔 수락산 철쭉도 아직 개화 전이었고 미세먼지도 심해서 전망이 그리 좋진 않았는데, 그다음 주에 불암산 전망대에서 다시 바라보니 수려함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으니 꼭 가보세요.
둘레길을 함께 걸으면 보통은 '공기 좋네', '산 좋구나', '꽃 예쁘네' 이런 말들을 나누며 천천히 둘러보겠지만, 완주가 목표였던 저는 걷기에 집중하느라, 사실, 주변을 잘 보진 못했어요. 계단도 많고 산 길바닥 여기저기 걸려서 넘어질만한 것들도 많거든요. 그럼에도 서울둘레길 시작점인 창포원에서 첫 번째 스탬프를 찍은 후 당고개까지 넘어가는 13km의 길에는 재밌는 게 많았습니다.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는 가운데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긴 했으니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가볍게 해 보려고요. 참고로, 서울둘레길은 산 정상을 가지 않습니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길, 마을 길, 하천길을 걸으며 서울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게 서울둘레길이거든요.
수락산엔 여러 명소들이 있지만,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채석장 터입니다. 처음 '채석장'이란 말을 들었을 땐 창신동 채석장을 떠올렸는데, 여긴 다른 목적으로 채석이 되었더라고요. 창신동 채석장 터는 항일운동 시기 서양식 건물을 짓기 위해 강제로 산이 깎인 수탈의 장소입니다. 창신동 낙산 줄기는 암석의 품질이 좋고, 접근성이 좋아 이곳에서 채취한 화강암으로 옛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옛 서울시청,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거든요. 해방 이후 채석장 사용이 중단되었고, 1960년대 무렵 폐쇄된 곳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현재의 창신동 돌산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요. 지금도 잘려나간 산의 모습은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수락산 채석장은 1960, 1970년대 개발에 필요한 석재 공급을 위해 채석이 된 현장입니다. 수락산 역시 1970년대 이후 채석은 줄어들었는데, 그 과정 동안 주변 정리가 되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던 돌들을 모아 층층이 축대를 쌓고 돌길도 만드는 등 노력 끝에 현재의 수락산 채석장터가 되었고요. 채석장 전망대라고 불릴 만큼 정돈이 잘 되어있는데, 그 사이사이 특정 형태가 연상되는 돌들이 수락산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제 눈에 가득 들어온 돌들이 있었는데, 그 돌들이 제 엉뚱한 상상을 부추겼죠.
연인 바위로 표기된 이 바위를 보고, 전 두 명의 예술가를 떠올렸어요. 김종영(1915~1982)과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 영국 런던). 이들이 떠오른 건 돌이라는 소재와 형태적 유사성 때문인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네요. (소재적, 형태적 유사성을 보이는 작가는 두 분 외에도 많아요~)
김종영은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그의 조각은 자연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단단하지만, 바람도 빛도 자연의 냄새도 투과가 되는 느낌이랄까. 화려한 기교나 세세하게 형태를 묘사하지 않은, 최소한의 관여로 표현된 그의 조각을 보다 보면 여러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도 그런 이유죠. 관람자의 생각을 담을 공간이 넓거든요. 그의 예술론은 "불각不刻의 美"로 축약되는데, '불각'은 작가의 의도를 최소화하고 사물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그 자체의 '생명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과 맞닿아있어요. 제 이전 포스팅에도 썼지만, 미켈란젤로는 "이미 그 안에 담긴 형상을 꺼낼 뿐"이라며 조각가는 '매체(소재) 안에 있는 것을 꺼내주는 매개자'라고 표현했는데, 이건 모차르트가 이미 머릿속으로 교향악을 완성하고 그 음표들을 악보로 옮겨오는 행위와도 같죠. 각 시대마다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알쓸신잡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정말 세기의 대담이 될 텐데 ㅎ
그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조각을 했기에 만년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크지 않습니다. 웅장한 조각보다는 비교적 아담한 크기로, 하나하나 소재의 맛과 형태가 두드러졌죠. 그래도 볼게 참 많습니다. 표면의 표현이 회화적이거든요.
김종영의 조각 중 미술관 소장의 작품과는 성격이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삼일독립선언 기념탑>(1963)인데요, 그는 평생 딱 두 점만 공공 기념 조형물로 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1963년 <삼일독립선언 기념탑>이고 다른 하나가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1957)이에요. 1960-70년대엔 국가 주도의 기념 조형물 제작이 붐을 이루던 때였는데, 이 두 점의 공공 기념 조형물은 국민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습니다.
1963년 8월 15일 탑골공원에 건립된 <삼일독립선언 기념탑>은 1979년 탑골공원 정비 사업으로 철거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정식 철거나 이전이 아닌 무단으로 철거되어 삼청공원에 덮개로 싸여 방치가 되었다고 하죠. 작가에게도 충격이 컸던 상황이라, 어떤 글에서는 이 이후 작가의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1982년에 생을 마감했다고 적어뒀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이 탑은 철거된 기념 조형물 중 유일하게 복원되어 지금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평창동에 있는 김종영미술관에선 《인생 예술 사랑》이란 주제로 무료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아직 한 달 정도 시간이 있으니 꼭 한번 가보세요. 가시기 전엔 홈페이지에서 작가에 대한 소개를 꼭 읽어보시고요, 정리가 정말 잘되어 있거든요.
안토니 곰리는 굉장히 유명한 동시대 원로 조각가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드문드문 소개되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이 이야기를 들어 본 분들은 계시겠죠? "한 점의 조각이 아무도 찾지 않던 탄광 도시를 관광지로 변모시켰다"라는 기적 같은 이야기. 그 작품이 바로 <북방의 천사 Angel of the north>이고, 그 작가가 안토니 곰리입니다. 예술로 이룬 도시재생의 성공적 사례로 첫 손에 꼽히는 작가 그리고 작품입니다.
안토니 곰리 <Angle of the north>(1998), steel, 22 × 54 × 2.20 m. Permanent installation. Gateshead, England. Commissioned by Gateshead Metropolitan Borough Council, Gateshead, England. 사진출처: (왼) https://www.thecollector.com/6-facts-about-the-angel-of-the-north/(오) https://www.antonygormley.com/works/sculpture/overview
영국 북동부 게이츠헤드(Gateshead)는 탄광과 철광 산업으로 번창한 소도시였어요. 1970년대 말부터 광산이 폐쇄되면서 지역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이 도시를 살리기 위해 시에서 도입한 방식이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이었죠. 지금이야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 방식이 보편화되었고 잘 된 사례도 넘쳐나지만, 그땐 그런 실험적인 도전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1990년대 중반부터 게이츠헤드 시에선 전대미문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1994년 안토니 곰리가 이 프로젝트의 계획안으로 강철 날개를 가진 거대한 천사를 공개했지만 지역주민은 거세게 반발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지역민들 입장에선 쇳덩어리에 16억 원의 예산을 퍼붓는 것과 거대하고 높은 쇳덩어리 때문에 TV 전파 송수신의 어려움, 비행기 운항의 지장, 그린벨트의 손상 등을 우려했다고 해요. 심지어 고속도로 초입이라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깜짝 놀라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신의 분노로 벼락을 맞게 될 것이라는 등 억지 의견도 쏟아냈다고 하고요. 그 당시 주민 설문조사 결과 80% 이상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는데, 그럼에도 시에선 포기하지 않고 주민을 설득했고, 외부 자본을 유치해서 진행한 프로젝트의 모든 예산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합니다. 작가도 주민을 설득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요. 이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작가는 <북쪽의 천사>의 축소 모형 5점을 제작했는데, 곰리가 자신의 신체를 모델로 철로 주조해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고, 사람 크기의 철제 조각은 관람자 눈높이에 맞춰 5m에 달하는 날개를 몸통에 용접해 완성된 작품이라 경매에서도 아주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어요. 청동으로 제작한 축소 모형은 게이츠헤드 시의회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2008년에 100만 파운드(약 14억 원)에 판매되어, 결국 <북쪽의 천사> 프로젝트에 사용됐던 800만 파운드 (약 12억) 기금 이상을 모형 작품을 통해 지역 사회에 되돌려 주기도 했고요.
현재 <북방의 천사>는 지역민의 자랑이자 영국의 자랑, 영국인들이 선정한 10대 문화 아이콘 중 하나로도 뽑혔고, 20만 명 정도가 사는 영국의 소도시에 매년 세계 곳곳에서 40만 명 이상 찾아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천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조각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천사상이었는데, 아직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았겠죠?
안토니 곰리는 시간, 공간, 인체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합니다. 대부분이 설치 작품이지만 다루는 작품의 영역도 넓고 작품 시리즈도 다양해요. 그의 작품 중엔 자신의 몸을 Live casting 방식으로 떠서 만든 작품부터 철과 강철로 된 조각들이 많은데, 대중적으로는 특정 장소의 환경과 역사성을 작품의 형식 안으로 녹여낸 ‘장소-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 작품들의 반응이 좋아요. 종교 철학과 그 영향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상실,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철학적 성찰과 사유가 담긴 작품이 많은데, 그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기엔 오늘 남은 시간이 부족합니다.
어쨌든 저는 그의 조각 시리즈 중 'memes(2009-2021)'이 모습이 수락산 연인 바위에 겹쳐 보이더라고요. 김종영 작품 사진 옆에 둔 사진이 <밈> 시리즈 중 하나예요. '밈(meme)'은 사전적으로 "비유전적 문화 요소[문화의 전달 방식](유전자가 아니라 모방 등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달됨)"를(을) 뜻하는 말로, 요즘은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어휘라 개념이 어렵진 않으시죠? <밈> 시리즈는 주철 블록을 쌓아 인체를 표현하는데, 사각형의 블록을 어떻게 구성하고 쌓느냐에 따라 실재의 감정을 지닌 대상처럼 그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눈코 입도, 세세한 묘사도 없는데 형태와 자세만 보고도 그런 감정이 전달된다는 게 참 신기하죠. 이 시리즈엔 총 33의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작가 홈페이지에 사진이 있으니 한번 참고해 보세요.
원래는 정선, 가우디, 폴 세잔이 영감 받은 인왕산, 몬세라트, 생 빅투아르와 우고 론디노네까지 썰을 풀어볼까 했는데, 벌써 하루가 훌쩍 지났네요. 오늘 다하지 못한 얘기는 서울둘레길 완주 기념이나 100대 명산에 입성한 다음에 써볼게요.
연휴, 답게 보내세요~ 저는 내일도 걸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