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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Nov 30. 2021

과거의 상처가 정체성이 되지 않도록

언택트 시대의 컨택트 출력물


매일 안구건조증을 호소하며 모든 행사에 참견하는 만성피로 하이퍼 리얼리즘 수간호사 캐릭터, 김반장입니다.

Q. 2021년 지역서점 문화활동 지원사업 '언택트 시대의 컨택트'를 마무리하며

  2021년 전반기는 여느 때 보다도 고민이 많은 시기였습니다. 조직 내 만연했던 낮은 위치에 대한 가스라이팅으로 3년 간 트라우마 장애를 앓았고, 긴 고독을 씹고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거든요. 극심한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는 지루한 괴로움만 남아 매일 마음속에 경보음을 울려 댔습니다. 또 누군가가 나를 해할지도 몰라. 또 누군가가 나를 의심할지도 몰라. 나뭇잎이 살랑이는 평안한 날씨에도 마음은 쓸데없이 피를 흘리고, 무사한 하루들을 견디는 것도 전쟁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시 조직의 안온한 보호 속으로 숨어들어 볼까. 나를 지우더라도 그것이 편할 수는 있겠지. 영혼은 밖에 두고 출근을 하는 거야. 그런데 어디 영혼이 거슬리면 버리고, 필요하면 다시 끼울 수 있는 나사못 같은 존재던가. 영혼은 거슬려도 불쑥 나를 막아서고 버릴래도 따라붙어 아무데서나 울음이나 터뜨리고 정작 필요할 때면 잔뜩 삐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잖아. 여기서 도망가 버릴까. 혼자서 일하면 낫지 않을까. 보기 싫다고 보지 않아 이르는 평안이 내 인생을 얼마나 낫게 할까. 그냥 이대로 막살까. 정작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느라 놓치는 것들이 아닐까.   
  그맘때쯤 '언택트 시대의 컨택트'를 만났습니다. 두두디북스의 실질적 리더 두두디님과 3명의 조합원들이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한 것이죠. 저도 잘 압니다. 제가 무모했습니다. 저는 누군가와 함께 아름다운 것을 만들 만한 마음의 재료가 없었습니다. 깨지고 다친 마음이 나동그라져 날 선 긴장이 뾰족하게 찔러대는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역시나 시작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기획서 제출을 일주일 남겨두고 우리는 우리의 이상과 현실과 의무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유 없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시작부터 서로에 대한 의심과 오해가 쌓였습니다. 각자의 본업에서 벗어나 기획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단 한 번의 주말과 4번의 주중 저녁 3시간 남짓.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명치 아래로 밀어 넣고 선정될지도 모르는 기획서 작성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기획이 선정된 건 마냥 반가워할 수 없는 성취였습니다. 여전히 의심과 오해가 마음에 남아 차라리 이른 실패가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 상처 받을 거야, 라는 두려움이 비둘기 날갯짓 같은 사소한 징조에도 저를 덜덜 떨게 만들었습니다. 비둘기야 어디에든 있는 존재인데 이렇게 겁만 내서야 뭐가 달라질까요. 제대로 만난 적 조차 없는 사람들을 겁내는 건 도깨비를 무서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딱 한 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기획이고 뭐고 모두 내려놓고, 옳음과 아집의 경계에 규율도 접어 두고 그냥 함께 있어 보기로 했습니다.
  2021년 5월 14일 토요일. 우리는 다섯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습니다. 웃었고, 떠들었고, 먹었습니다. 하도 웃어 목이 쉬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인생의 다음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화해'라는 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이 시작했습니다. 역사기행 강연, 미술여행 강연, 보자기 공예, 꽃집 소상공인 생존기, 그리고 청년 고민상담소까지 5개월 간 5번의 만남을 주선하였습니다.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은 즐거울 때보다 고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분명 시간을 먹고 빛을 발하는 가치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가슴이 뜨뜻해지고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오래도록 기분 좋아지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기억이요.
  저는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지나간 자리마다 흠결 투성이라 그 생채기가 곧잘 화석처럼 굳어 나를 못 살게 굴지만, 과거의 상처가 내 정체성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타인의 말에 섣불리 생각의 집을 짓지도 않으면서도 충분히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하고 또 용서받을 수 있는, 사회학자 엄기호의 말대로라면 '불화도 만남의 한 형식'인 우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심 없는 우정에는 충분한 시간과 사건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언택트 시대의 컨택트'로 그 세 가지를 모두 얻었습니다. 서로 반목하다 이해하게 된 시간, 함께 새로운 만남을 기획한 사건, 그리고 두두디북스라는 공간을요.
  길을 잃는 멍청한 개미가 정해진 길대로 가는 명석한 개미보다 먹이를 더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멍청한 개미처럼 길을 잃은 덕분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좋습니다. 얼마만큼 좋으냐면, 마음에 숲이 생긴 것처럼, 새들이 지저귀고 풀내음이 간질이고 흙길이 너르게 나를 품는 숲이 생긴 것처럼 그렇게 좋습니다. 웅크린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매력의 소유자 크리스탈 킴, 타인을 보살피는 마음으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기어코 찾아내어 도움을 주고야 마는 엉뚱 소녀 미네르바 최, 반짝이는 당신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조율사처럼 우리를 기막힌 화음으로 이끌어준 두두디님과 모든 행사를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신 혜일리님, 기술적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차누스트라님, 그리고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Q. 두두디북스에게 바란다
두두디북스는 지나치게 친밀하지도 누구 하나 소외되지도 않는 분위기가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두디북스에는 풀에 물을 주고 습도를 조절하여 꽃이 피기를 기다리듯, 즉 상처 입기 쉬운 식물 대하듯 사람을 대하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개성을 위계에 구겨 넣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겠죠. 처음에는 조합원들이 경제적 이익 없이도 시간을 내어 정성을 쏟는 시스템이 의아했는데, 조합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하나같이 두두디북스 공간이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무르며 알려지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 하니 '순수한 애정'이라는 말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습니다. 두두디북스는 역할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적인 교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이자, 스스로를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밀실이기도 합니다. 두두디북스가 공간에 대한 철학을 지켜가며 이 자리에 있어준 덕분에 사람들은 조금은 더 인간적인, 인간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바라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지금 이대로 머물러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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