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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an 29. 2022

신문지 놀이

오은 시인의 칼럼을 읽고

오은 시인의 칼럼에서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속담을 봤다. 기껏 원하는 것이 하찮은 것을 비유하는 속담이라는데 내가 딱 그런 인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큰 꿈을 꾸지도 않고, 내가 만지지 못할 것을 바라지도 않고, 갈등이 생길라 치면 얼른 줘버리고 마는 인간. 그렇다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을 가르고 날려서 내가 뻗은 팔 안에 있는 것만 마음껏 취하고 쉬이 숨어드는 종류의 인간이랄까.

시인의 칼럼을 덮고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그 위에 올라섰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신문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

가족이 아팠다. 며칠 후 또 다른 가족이 아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으로 수많은 가정들을 쏟아 냈다. 이번에도 또 그러면? 누군가가 생업을 포기하고 병원을 가야 한다면?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며 마음이 출렁였다. 내가 하는 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0원짜리 하나의 수고도 들이지 않았으나 염치없이 걱정을 쏟아냈다.


염치없는 걱정 값으로 가족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양으로 얼음 성이 우뚝 선 청송  얼음골이었다. 얼음골을 가서 사진을 찍고 경주에서  독립서점을 구경했다. 옆에서 고르는 것을 보고 나도 얼른 하나 집어 들었는데, 화가가 가족의 일상을 그린 10년 간의 그림일기였다. 책 읽다 이내 잠든 동생의 그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엄마의 그림, 발톱을 깎는 그림을 보았다.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이 되고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이 되는 곳이 가정이라더니.


반으로 접은 신문지 위에서 헛헛해서 웃었다.

치매 어르신들은 자꾸만 길을 떠났다. 어르신들은 명절맞이 시장을 찾아 잠시, 화장실 가는 사이 잠시, 그 '잠시'의 문을 열고 저 멀리 모험을 떠났다. 발 빠르게 범인을 잡던 형사들도 치매 어르신은 어쩔 도리가 없다. 범인들은 목적지로 질러가지만 치매 어르신들은 배회한다. 인생의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처럼 어느 인정 많은 여신의 섬에 갇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손목에 차고 있던 위치추적기도 배터리가 나가거나 끊어지기 일쑤, 수많은 형사들은 매일 cctv를 뒤졌다.

cctv는 화면이 어둡고 깨져서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구 하나 보일라 치면 휙휙 고개를 돌린다. 골목마다 완벽히 세계를 재현하는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것도 소유주가 다 달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협조를 구한다. 어르신은 5일 전 아침에 집을 나갔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아침에 머물러 있다. 세상에 파란 패딩을 입은 어르신이 어찌나 많은지  찾았다 싶으면 다른 사람이니, 두 다리로 세상을 누비는 그 어르신을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다. 차라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을 한 알씩 받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타 먹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신문지 반 장을 한 번 더 접고 그 위에 올라섰다.

브런치의 주소와 별명을 모두 바꿨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나의 글을 모두 찾아 읽었다고 한다. 우연히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다른 플랫폼의 후기들까지 찾아 읽더니 이제는 브런치도 찾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 글의 어느 부분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하소연을 했다는데 그 어린 마음이 마음 아파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어른답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정초부터 할 말은 아닌 거 같아 지금 한다. 그 아이가 보는 줄 알았으면 다른 데 썼어야지.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데 하지 말라 할 수도 없고, 네가 별명을 바꾸던지 다른 데다 글을 쓰면 안 되겠니.

신문지를 한 번 더 접었다.

여전히 예전 별명으로 검색되는 글이 있다. 매거진을 지우고, 이제는 브런치까지 지워야 하나.

한 발로 서 있다. 이제 나는 전장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졸개다. 요즘엔 싸울 힘도 없다. 예전에는 시시각각 싸우고 소리 지르는 부모님이 싫었는데 요즘에는 부럽다. "엄마,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싸우더라고. 보기 좋네." 그러면 엄마 아빠는 박장대소를 한다. 그래 그럼 애는 언제?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얼른 애를 낳아야 하지 않겠니?

마음 한 톨이 쿨럭대며 기침을 한다.
신문지 위에서 거슬리고 생채기 나는 사소한 일들도 기침과 다름없다.

'나를 좀 내버려 둬'

말을 삼킨다.

이건 말이 아니라 기침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 신문지 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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