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의미 있는 시간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그저 습관처럼.
일기 쓰는 방식도 가지각색이다.
양장 표지의 멋들어진 일기장을 마련해서 쓰는 사람, 예쁜 스케줄러를 사서 색색깔 펜으로 귀여운 스티커로 자신만의 하루를 장식하는 사람.
사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앞서 말한 것 같이 발전적인 이유나 귀여운 방식으로는 봐줄 수가 없다. 일단 무엇보다도 나는 악필이다. 흘려쓰면 귀신같고 꾹꾹 눌러쓰면 남자아이가 썼을 법한, 도무지 '필체'라는 반복적인 패턴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드는 그런 글씨체다. 그런데다가 매일 일기를 컴퓨터로 남기지도 못할 게으른 아날로그 감성에, 바쁘게 살면 꼭 한 번 병치레를 하는 신체적 나약함까지 갖춰 한 번 마음잡고 일기 쓰기가 무진장 힘들다.
무릇 일기란 손글씨로 써야 된다며 연필 잡을 마음 생길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꼭 아무렇게나 쓰는 다이어리를 펼쳐들 때가 있기는 하다. 하루가 무탈하게 흘러가면 그다지 되돌아보지도 않거니와 꼭 일기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앞서 말한 발전적 이유로 일기를 써야 해서 다이어리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그다지 작지 않은 내 머리통의 뒤에서 잡아당기듯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일기를 쓸 수밖에 없어서' 일기를 쓰는 것이다.
게으른 나를 일기장 앞으로 데려다 놓는 힘은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우울할 때 일기를 쓴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책과 세계>, 강유원, 살림p4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듯, 병든 인간이 글을 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책 읽는 게 너무 지루했고, 활자가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 언어능력을 가진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도무지 느려터진 활자들을 따라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존경하는 김영하 작가님은 새로운 세계에 빠져드는 재미에 소설을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던데, 나에게는 소설을 한 번 잡는 것이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유독 병들었을 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우울할 때 일기를 쓰면 좋은 점들이 있다.
첫 번째, 글을 쓰다 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우울해지면 뇌가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무기력하고 손가락 까딱하기도 힘든 탈진 상태를 경험하면서도 뇌는 빽빽 소리를 질러댄다. 뇌가 활동적으로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울할 때는 사소한 일처리도, 아주 작은 판단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뇌의 기능적 저하가 야기되는 까닭이다. 나의 경우는 아주 단순한 작업의 처리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지기도 했다. 우울한 뇌는 해야 할 모든 활동을 멈추는 동시에, 살면서 가장 나를 괴롭혔던 말과 감정, 기억만이 자극되어 멈출 수 없는 알람처럼 울린다. 그 스위치를 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을 자버리면 나을까. 잠도 못 잘 정도로 시끄러우면 어떡할까.
그때 일기를 쓰는 것이다. 뇌에서 빽빽대는 소리들을 받아 적는다. 최대한 솔직하게 적는다. 한참 동안 쓰고 있으면 뇌 속의 시끄러운 소리가 차츰 잦아든다. 그때 내가 썼던 글을 찬찬히 읽는다. 그럼 보인다. 나를 괴롭히던 나의 '비합리적 신념.'
두 번째, 내가 쓴 일기를 읽다 보면 내가 왜 우울한지 알 수 있다.
정도언 작가님의 '프로이트 의자'라는 책에서는 우울을 '되돌아온 편지'라고 정의했다. 어떠한 일로 화가 난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면 그 화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나를 공격한다. 그 화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괜한 사람에게 혐오를 비추기도 하고, 괜스레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만하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쌓아둔 화가 결국 터지기도 한다. 아주 무서운 모습으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한 선택으로 인해 내 안에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다. 바쁨에 치여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다 보면, 쉬는 순간에도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중독 거리를 찾아내거나 그 불안에 탈진하는 것이 어른들의 삶이 아니던가. 여차여차한 변명들로 사람들은 바쁘고,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은 찾아온다. 원치 않은 손님을 맞은 사람은 이것이 그저 재난 같겠지만 이 손님은 여간해서는 쉽사리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울증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우울증은 마음에 유행 지난 재고가 쌓여 도저히 못 참겠다고 나를 찾아온 악성 민원인이다. 민원 맞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단순하다. 바로 마음속에 쌓여있는 재고품 정리, 즉 내 마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휘갈겨 쓴 일기를 천천히 읽다 보면 그것들이 보인다. 잘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마인드맵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언제부터 우울했는지, 그날 기분은 어땠는지, 그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느낀 감정이 뭔지, 그때 든 생각은 무엇인지, 그와 연관되는 과거의 기억은 무엇인지.. 계속 그려 나간다. 이런 시각적 작업은 사람에게 말로 털어놓을 때보다 정확하게 나를 인지하고 진단하도록 도와준다.
우울한 사람의 뇌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글로 써야 한다. 내가 왜 우울한지 눈으로 봐야 한다.
세 번째,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인간은 타인이 존재하는 이상 솔직할 수 없다. 물론 아주 신뢰할만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제법 건전하고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밑바닥까지 솔직할 수는 없다. 특히 나의 마음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타인에게 솔직할 수 없는 요소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된다. 나의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것이고, 내 사회적 역할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 솔직함을 용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부모님이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어렸을 적부터 '너 때문에 내가 병이 날 정도로 고생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고 생각해보자. 지금은 부모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부모님도 그때는 너무 젊었고, 부모로서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현실에 치여 지친 마음에 여리고 작은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 마음 깊은 곳에 그 말이 남아 오래도록 나를 맴돌다가 나를 '부모님에게 폐만 끼치는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하게 하고, '타인에게 쓸모없는 존재'로 확장되었다가, '영원히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이행되어 지나치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주위 사람에게 헌신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면?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해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면? 우울에 시달리다가 일기를 쓰고 내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보다가 그 첫 시작에 부모님의 잔인한 말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 부모님을 이해하지만 현재 닥친 괴로움에 부모님이 원망스럽다면? 그러한 것들을 타인에게 속속들이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심리상담을 받을 때는 어느 정도 예외다. 심리 상담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다. 지금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심리 상담을 적극적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상담 선생님이라도 처음부터 나의 모든 것을 사심 없이, 두려움 없이, 조금의 허세도 없이, 인정욕구 없이 말을 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도 대나무 숲에서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은 자유의 반대말이다.
그와 달리, 한낱 종이 쪼가리는 나를 판단할 수 없다. 고로 자유롭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우울일기를 쓴다고 해서 우울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우울감 정도는 쉽게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래되고 깊은 감정에서 뿌리내린 우울증이라면 그렇게 쉽게 나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렸을 적 대학교 선배가 했던 말이 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참는 것'이라고.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꼭 이 말이 생각이 난다. 무언가를 변화하는 것, 하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것도 일종의 상실이다.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나의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이유를 알아내고, 나를 자극하는 요인들을 진단하고, 나를 돌보는 과정 중에도 매 순간 무의식적으로 우울한 뇌는 우울을 잃지 않으려고 빽빽 울어댄다. 그때마다 나를 우울하게 하는 '비합리적 신념'을 인식하고 그것을 흘려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매일의 과정이다. 어쩌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시작조차 할 수도 없다.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어떤 희망도 없다. 희망이 없는 곳은 지옥이다.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 일기를 써야 한다.
우울은 '내 마음의 보석함'이다.
우울 일기를 통해 그것을 열어 보면 모든 것은 변한다. 등 떠밀리듯 우울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절망감이 사그라들 것이고,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던 것들이 아주 작아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내 삶이 괜찮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더 깊이 나 자신과 세상을 알게 됐다는 합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