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반장 Oct 16. 2019

아버지를 납치하다

부모님 세대와 대화하기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내가 집에 간 이유는 며칠 전에 아버지가 전화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오래 소식이 없으면(2주 정도?) 아버지는 나에게 전화해서 버럭 소리부터 지른다.
요지는 "내가 보고싶지 않냐."는 것이다.
드라마 '상속자들'의 주인공 탄이가 박신혜에게 '나 너 좋아하냐?'고 묻듯,
아버지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화법으로 '자식이 보고싶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멋진 계획을 세웠다.
이름하야, '부모님 납치 계획'

우리 부모님은 한 평생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하신 자영업자라 가게 문을 닫고 어디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신다.
아버지는 간다 했다 안간다 했다 변덕을 부리고, 어머니는 먹지도 않을 음식을 몇 시간 동안 싸며 아버지에게 예쁜 옷으로 갈아 입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여행을 한 번 가려고 해도, 간다고 했다가 또 갖가지 변명을 대며 장소를 옮겼다가 끝내는 가지 않는다.
어떻게 어떻게 겨우 설득해서 차 뒷자석에 모셔 놓는 데 성공하는 날에는,
목적지 까지 가는 동안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마음에 안드는 점에 대해 디스전을 펼치다가
(예를 들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너는 성이 반씨라서 반쪼가리다.' '무식해서 남의 말을 너무 잘듣는다.' '아침에 국을 안 끓인다.'고 선동전을 펼치면 어머니가 '니 아부지는 너무 똑똑해서 잔소리가 많다.' '40년 간 아침에 국 끓여 줬는데 어제 한 번 숭늉 줬다고 저런다' '왜 그렇게 말이 많냐'하고 응수 하는 식이다.)
이내 너무 가게를 오래 비웠다며 빨리 돌아가자고 못살게 구신다.
언제는 또 허리가 안 좋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 한 번 가보려고 아버지를 모시러 갔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가기 싫다고 목욕탕으로 도망가버리신 적도 있다.
그 때가 3년 전 쯤인거 같은데, 아버지는 아직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지금은 내 허리가 너무 좋다. 그때 병원 갔으면 어쩔 뻔 했냐. 의사가 수술이라도 시키면 큰 일 난다.'고 랩을 하신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정쩡한 응가 바지를 입은 사람처럼 걷는다.


그러다 부모님을 성공적으로 모시고 나가는 방법을 깨쳤는데, 그게 바로 납치였다.
어디로 가는지는 말씀 드리지 않고, 집 근처에 볼 일이 있으니 빨리 차에 타야 된다고 정신 없이 연막을 친다.
부모님이 차에 타면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떠난다.
멀리 바다 보이는 길을 달리며 아버지에게 '지금 당신들은 납치된 상태이고, 운전대는 우리가 잡고 있으니 우리가 돌아갈 마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친절히 고지해 드린다.  

어제도 집에 도착하기 2시간 전에 급하게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빨리 나가야 한다며 꼭 가야할 데가 있다며 어린애 처럼 졸랐다.
아버지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가게 문을 닫고 차에 올라 탔고,
옆 집 세탁소 아저씨가 '어디 가세요?'하고 묻자 함박 웃음을 지으며 '몰라~ 나 지금 납치 당하는 거여 납치'하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마 가게 안에 계시던 미용실 사장님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차에 올라 타자마자 세상의 모든 잘못된 점을 지적하시는데,
어제의 희생양은 바로 '조국과 문재인 정부'였다.
얼마 전에 어머니와 식탁에 앉아서 '조국대전' 1차전을 펼쳤던 터라,
아버지와 2차전을 펼칠 생각을 하니 앞이 아득해져 왔다.

잘 모르겠다.
우리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는 말도 들은 것 같고, 광화문 집회의 위대함을 설파했던 것도 같고,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왜 일본에게 경제 보복을 하면 안되는지 쉼없이 말씀하셨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버지 눈엔 그저 철딱서니 없는 젊은이들 중에 한 명이 바로 당신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나도 모르게 일그러진 표정을 숨겨야 할까.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런데 나의 이런 복잡한 머릿 속과는 다르게
내 입은 아주 열심히 아버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니 아부지, 우리나라 공산국가 안돼요, 그런거 걱정 하지 마요. 우리가 공산국가 되잖아? 그럼 미국이 가만히 안있어요.' 그러면서 몇 달 전에 읽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떠올리며 미국CIA와 공조한 쿠데타 세력에 암살당한 아옌데 대통령 이야기도 하고, 부모님이 받은 정보와는 다른 증거들을 조목조목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너희 젊은 것들은 배고파 보지 않아서 모른다.'며 또 '공산당이 싫어요' 미사일을 쏘셨고,
나는 또 아버지와 입씨름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다가
고깃집에 들어가 맛있는 고기를 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주 무심한 자식이라 살면서 부모님과 대화한 적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그저 답답하고 무서운 존재였고, 어머니는 나에게 피곤한 존재였다.
우리 부모님은 유달리 걱정이 많고 모든 대화를 지적과 의무로 채우는 성실한 분들이시라 어린 시절 나에게는 매우 버거웠다.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도망가기 바빴고, 대화라도 할라치면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독립을 하고 나서는  우리 가족들과의 대화를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우리 가족들이 같은 주제로 3마디 이상 대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말만 할 수 있는지.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 나는 말이 무척 빠르다.
눈치 게임 처럼 다른 가족이 말하기 전에 치고 들어가야 하고, 3마디 안으로 대화의 주제를 마무리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이제 그럭저럭 부모님과 '대화'라는 것을 하게 된 계기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계기는 몇 년 전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가게에 앉아 있는 나에게 '배고픈게 얼마나 서러운 건 줄 아냐. 나는 배고픈게 너무 서러웠다. 배고픈게 제일 서러운거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잔소리는 많으시지만 본인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 가끔 이렇게 본인 이야기를 할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다. IMF 쯔음 대기업에서 퇴직하신 아버지는 매일 '친구는 다 필요 없다'고 외치곤 하셨는데, 어느 날 슬쩍 '퇴직한 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 때도 마음이 아팠다. 어쩌다가 '사람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참는다.'라는 명언을 남기신 적도 있는데, 사회생활 하다보니 이 말이 오래된 잠언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에게 '배고픈 서러움'을 들은 날에도 나는 마음이 아팠고,  아버지의 존재를 다시 만난 듯 했다.  그날 나는 자식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괴팍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셔도, '그래. 아버지는 가장 서글픈 배고픔을 겪으셨으니까.'라고 생각한다. 까놓고 말해서, 아버지가 춥고 배고픈 옛날 옛적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일만 하고 달려 온 과거의 시간을 저당잡았던 것은 자식인 나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부모님 세대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느라 얻은 관절염같은 분노로 멸시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부모님 말씀도 듣고, 반박도 하면서 '대화'라는 것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부모님의 생각을 경시하지 않고, 내 의견도 유연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두번째 계기는 작년 이맘때 쯤 들은 정혜신 작가님의 강연이다.
  살면서 내 자신이 정말 싫을 때가 있다. 작년에 내가 그랬다.  내가 너무 쓸모 없어서 어디 가서 버리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 때 정혜신 작가님을 만난 것이다.

  이 날 강연의 주제는 '당신이 옳다'라는 책이었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은 심리적 CPR 매뉴얼이다. 작가님은 책의 제목인 '당신은 옳다'라는 말은 '모든 마음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작가님은 강연을 시작하며 '공감'과 '감정노동'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감정노동'은 에너지 소모가 많고, '공감'은 에너지 소모가 들지 않는 일인데,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를 지워가면서 공감하려고 애쓰는 것은 나도 망치고 남도 망치는 일이라고 하셨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거나, 무조건 긍정하거나, 모르면서 참고 견디는 공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감정노동'이다.
  반면에 진정한 '공감'은 내가 상대방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공감에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필요치 않다. 그저 "그랬구나"하고 상대방을 알아가면 되는 것이다.

  공감을 할  때는 눈을 맞추고 '존재의 핵심'을 물어야 한다. '존재의 핵심'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상처를 이야기 한다고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털어 놓는 상처는 상황이나 사건일 뿐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 '그때 네 마음은 어땠는데?"라고 묻고 그 존재 그대로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공감이다. 작가님은 오로지 마음이 공감의 과녁이고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공감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작가님은 이 날 강연에서 부모님에 대한 말씀도 하셨다. 이는 책에도 잘 나와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는 후배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부모님이 실망하실까 봐 못 그만두고 갈등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네가 부모님을 너무 단순한 존재로 보는 거 아니니."
"네가 부모님을 너무 관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니."
...(중략)...
'내가 이렇게 하면 우리 부모는 반드시 이럴 것'이라는 생각.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변하는 상황과 현실에 따라 부모도 함께 움직이는 능동적인 존재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부모도 상수(정해진 수량)는 아니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해냄 p44


   누군가가 꽝 하고 징을 울리는 듯 했다.
   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며 5분에 한 번은 뭉클하게 눈물이 솟아올랐는데, 이 말에는 정말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게 팩트폭행인가...

  내가 오만했다.
  고작 삼십 몇년의 편견으로,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나에게 몰두했던 내가 한 존재를 멋대로 판단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옹졸한 짓인가.
  가까운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그 사람을 단순화시키고 내 멋대로 정의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었는지, 가슴 아픈 자각이 내 머릿 속에서 광광광 울려댔다.


   강연이 끝나고 급하게 책을 사서 작가님의 사인을 받기위해 기다리면서 작가님에게 편지를 썼다. 아무렇게나 찢은 수첩에다가 악필을 갈기면서 작가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 날 부모님을 만나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일과 나의 상황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너무 감동적인 강연이었고, 책을 읽으면서도 내 마음이 몇 번은 울어댔지만
  너무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님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의 훈훈한 사례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조금 더 참았으면 했고, 나의 문제점을 고민하셨고, 나에게 그들을 이해시키려 하셨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다음에 만날 때도, 그 다음에 만날 때도
  계속해서 눈을 마주치고 내 마음을 말씀드렸다.

  이제 일 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옆 집 아줌마의 말을 빌려 걱정하는 투로 나를 열불나게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대화 비슷한 것은 한다.

  '힘들게 오지 말라'면서도 진짜 집에 가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집에 가면 자식들을 붙들고 밤새 정치논쟁을 벌이고 싶어하는 우리 부모님은
  나와 함께 성장하는 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