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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방랑자

호밀밭의 파수꾼

by 김반장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다.
인간에게 여러개의 가면이 있다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날 때 쓰는 가면은 '지적인 호기심'이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아주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사는 것은 무엇인지 서로에게 깊이 궁금해 한다.
대학생들이 갈 법한 어둡고 허름한 바에서 데낄라를 마시며 밤새 대화를 한 적도 있고,
간단한 안주에 맥주로 목을 축여가며 몇 시간이고 떠든 적도 있다.

그 날 대화에서 나온 소재가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영미소설 중에 인생책을 꼽으라 하면 보통 사람들은 '앵무새 죽이기'와 '호밀밭의 파수꾼'을 든다고 했다.
나는 둘 다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지었다.'며 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제목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고 농담 섞인 말을 건네고는 다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 보리라 마음 먹었다.
제국의 문화는 이렇게 전염병처럼 퍼지는 것인가 보다. (뜬금 '사피엔스')

나에게는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책이 있으면 그 책이 꼭 눈 앞에 굴러다녀야 한다.
당장 읽지는 못하니까 읽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름의 변명이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서재 한 쪽 벽면 책장에 책이 쌓여 있고, 그 중에 또 200권 정도는 거실에 따로 책장을 두고, 또 그 중에 30권 정도는 거실 쇼파에서 굴러다닌다.
내 책 읽는 속도는 책 사는 속도를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을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다행히 책은 내게로 왔고,
또 몇 주간을 내 곁에서 굴러 다니다가
이제야 다 읽었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어느 소설이든 읽다보면 줄을 치거나 표시하고 싶은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달리 줄을 긋고 싶은 멋진 문장이 없다. 아마도 불안한 10대 남자 아이의 시선으로 쓴 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은 뉴욕에서 태어난 상류층으로 부유한 아이들이 다니는 팬시고등학교의 기숙사에 산다. 하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성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하는 가식적인 행동들에 냉소를 보내는데, 주인공이 자주 하는 말은 '엉터리' '미치게 만든다' '사람 죽이는 것이다.' '형편없다' '구역질이 난다' 등등이다. 한국으로 치면, '짜증난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고 때로는 괴팍하고, 자기경멸적인 어조로 쓰이다 보니, 세련되고 정돈된 문장이 나올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면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줄거리나 세련된 몇 문장으로는 그 가치를 말하기 어려운 책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이방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소설은 홀든이 팬시고등학교에서 퇴학을 선고받고 그 주 토요일부터 3일간의 흐름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철저히 홀든의 입장에서.
홀든의 퇴학 사실은 수요일에 부모님에게 통보되도록 되어있었다. 하지만 홀든은 여색을 밝히는 룸메이트가 어렸을 적 친구 '제인'과 데이트를 했다는 이유로 몸싸움을 벌이고는 토요일 한 밤중에 학교를 나와버린다. 토요일 뉴욕에서 산 빨간 사냥 모자의 모자 챙을 뒤로 돌려 쓴 채.

소설 전반에서 홀든은 그 모든 바보같은 것들에 대해 냉소를 비치다가, 불안한 쾌감과 우울을 왔다갔다 하다가, 끝내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자기 경멸에 빠진다. 그 사이사이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내비칠 때가 있는데, '순수한 사랑'을 대변하는 옛 친구 제인과 백혈병으로 죽은 동생 앨리를 생각할 때이다. 홀든은 똑똑하고 인간성 좋은 앨리가 죽었을 때도 제인과 룸메이트의 데이트 사실에 분개했을 때 처럼 이성을 잃고 차고 유리를 모조리 박살냈다고 한다. 홀든은 제인을 그저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취급하는 룸메이트와 앨리의 죽음에 관습적인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분개한다. 제인과 앨리의 순수성, 특별함, 개별성이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허울들로 훼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홀든을 '정신적 결벽증'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홀든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홀든은 학부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허접한 스테이크를 내놓는 학교, 창녀와 포주, 허영에 찌들린 데이트 상대 샐리, 그 모든 세상의 허울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을 찾는다. 학교의 스펜서 선생을 찾아가고, 창녀를 호텔방에 불러 들이고, 뉴욕에서 샐리를 만난다. 그러다 스펜서 선생의 설교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도망치듯 나오고, 포주에게 돈을 뜯기고, 샐리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조르며 실언을 한다. 하지만 그 누가 홀든을 비난할 수 있을까. 방황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지금 방황 중인 사람이라면 홀든의 실소터지는 에피소드들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홀든은 끊임 없이 도망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라 학교를 뛰쳐 나오고, 자기 자신을 잊으려 바보같은 짓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정말 미친짓의 연속이고, 끊임없이 지껄이기만 하는 홀든이 짜증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홀든이 그리는 궤적의 목적지는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명확해 진다.
살아 있는 순수, 여동생 피비를 만났을 때이다.

홀든은 죽기 전에 피비를 만나기로 결심하고 몰래 집으로 찾아간다.
자고 있는 피비를 깨워 피비에게 주고 싶었던 레코드, 실수로 깨뜨려버린 그 레코드를 건넨다. 피비는 그 쓸모 없는 선물을 받아 소중하게 서랍에 넣어 둔다.
홀든은 피비에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구역질나는 현실에 대해서 말해준다. 수업을 감시하며 너절한 농담을 늘어 놓는 교장, 동창의 날에 학교에 찾아와 충고를 늘어 놓는 늙은 졸업생.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생각해 낸다. '거만한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화가난 친구가 다른 친구 6명을 몰고 가 위협하고 폭행을 가했지만 절대 그 말을 취소하지 않고 끝내 창밖으로 몸을 던졌던 동급생 제임스 캐슬, 뉴욕에서 아침 식사를 하다 우연히 만난 수수하고 신실한 수녀들, 그리고 앨리.
홀든은 피비에게 말한다.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자신의 꿈이라고.
유일하게 홀든의 진심을 들어주는 순수한 피비는 홀든의 영혼을 비춰주는 창문이다.

여기서 나는 망나니 같던 홀든의 예리한 인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리한 인식의 칼날이 홀든의 주변인들로 인해 무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든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지만, 홀든 주위의 그 누구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문화가 만들어낸 허울에 안전하게 갇혀 있길 바랐다. 그러다보니 홀든도 자신이 생각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신을 경멸한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기대를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존경하는 엔톨리니 선생을 만났을 때 특히 그런 면이 잘 드러난다.
홀든은 피비를 만난 날 존경하는 엔톨리니 선생님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려다가 잠결에 선생의 손길을 느낀다. 홀든은 깜짝 놀라서 선생에게 짐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둘러대며 집을 뛰쳐 나온다. 처음에는 '변태같은 짓'에 당황해서 뛰쳐나왔다가, 시간이 흘러 나중에는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지, 갑자기 자신이 가버려서 선생이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봐도 엔톨리니 선생은 변태적일 것이다. 진실은 '변태적'인 것이 맞지만 홀든은 자신이 느낀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말했듯, 진실은 아름답지 않다. 홀든은 똑똑하고 착한 앨리의 죽음으로 삶의 덧없음을 인식했다.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허울을 알아차렸으며 그 거짓의 향연에 끊임 없이 역겨움을 호소한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은 인간이 꾸려놓은 질서에 장애가 될 뿐이므로 그 누구도 그것이 진실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홀든에게 훈계하고,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진실이 인정받지 못할 때, 그 진실을 인식한 사람은 우울의 나락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경증 우울증을 이루는 것은 삶의 덧없음과 한계에 대한 이러한 예리한 인식이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민음사 p26

하지만 홀든은 '제인'과 '앨리'로 대변되는 순수를 결코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추억과 죽음이라는 극한의 순수와 구별되는 인간사의 허울들(학교, 부유함, 비싼 가방, 연극, 어른들의 충고 등등)은 살아있는 인간이 똥을 싸거나 묵은 때를 벗겨내듯 생존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불결함 같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는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가 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의 감옥에 수용됐을 때 어떻게 죽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야코프는 감옥의 변소를 똥 투성이로 만들어 놓기로 유명했다. 이를 용납할 수 없던 영국인들이 그에게 변소청소를 강요하자, 그는 '러시아 말로 끔찍한 저주를 하늘에 퍼부으며 수용소를 둘러싼 고압 철조망으로 달려갔다.(p390)' 밀란 쿤데라는 이를 형이상학적 죽음이라 일컫고, 똥을 철저히 부정하고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의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부른다. '키치'는 인간의 결함과 개별성이 무시되는 공산주의 ,전체주의, 행진과 슬로건 등이다.
홀든이 지켜내고 싶어하는 극한의 순수는 철저히 똥을 부정하는 '키치'의 위선이 아니고서야 생동하는 존재에게는 있을 수 없다. 오직 멈춰버린 홀든의 상상 속이나 죽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홀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빨간 사냥모자를 쓴 순수한 영혼 홀든. 그는 결국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한다. 예상치 못하게 자신을 따라오려하는 피비의 순수함에 미소지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홀든은 살아있는 피비의 순수함을 통해 죽음 속에 감금된 극한의 순수를 포기하고,
비로소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다짐한 듯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시킨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보고 싶다는 것 뿐이다. 예컨대 스트라드레이터와 애클리마저 그립다. 그놈의 모리스 녀석도 그립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p313


내가 예전에 의무감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홀든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마주한 홀든은 여전히 불안하고, 방황하는 30줄의 내 모습이다.
아직도 나는 홀든처럼 내가 인식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미숙한 부적응인지 잘 모른다.
학창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부조리하다고 인식했고, 나를 탓했고, 방황했고, 우울했다.
어른이 되어서 어른인 척 하는 나는 아직도 그 과정 중에 있다.

다만 지금은
우울의 끝에 어둠을 털어내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은 더 정제된 방황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 지금 홀든과 같은 우울과 방황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홀든 처럼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나를 마주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어 주라는 것이다.
세상을 유지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운 어른들,
친구의 방황에 동참했다가 자신의 견고한 안정에 금이갈까 두려운 친구들,
세상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굳이 들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것들이 진실이고, 진실을 찾고자하는 내 마음이 진심이라면
방황의 끝에서 그것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모든 깨달음은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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