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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16. 2019

우리집 강아지가 나를 돌보는 방법

우울할 때 강아지와 함께 하면 좋은 점

우리 강아지 크림이는 4살이 되어 우리집에 왔다.
크림이는 아픔이 많은 강아지다.
새끼때 부터 있던 집에서도 사랑은 많이 받았지만, 갑작스럽게 닥쳐온 집안의 변화에 많은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크림이와 함께 있던 강아지는 무더운 여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크림이는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 갇혀 새끼 때부터 쓰던 작은 플라스틱 집에서 가만히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크림이가 우리집에 오게된 것은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갑작스레 나에게 시간이 많아졌고, 많이 우울했고, 숨쉬듯 불안을 느꼈던 시기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집에 오게된 것이다.
크림이는 우리집에 와서도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짖지도 않고, 헥헥대지도 않고, 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처음 키워봤기에 모든 강아지가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크림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크림이가 얌전하다' '사람 눈치를 많이 본다' '너무 가만히 있어서 인형같다'고 말했다.

한 달쯤 지났나, 이제는 크림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되돌려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강아지였고, 익숙치 않은 존재가 나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크림이를 돌려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크림이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가도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와있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강아지라며, 집 안에 크림이를 위한 물그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점점 크림이의 물건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두 달쯤 부터는 매일 빗질을 해주기 시작했고,
병원도 데려가기 시작했다.
크림이의 간식을 고르고, 장난감을 샀다.
밤이 되면 크림이는 자연스레 침실로 걸어들어와 함께 잠을 잤다.

우리 크림이는 내가 책을 읽으면 슬금슬금 다가와 곁에 앉는다.
내가 엎드려 있으면 조심스레 내 옆구리에 붙어 몸을 둥글둥글 만다.
새우잠이라도 잘라 치면 크림이는 내 등 위에 찰싹 붙어 몸을 공처럼 만들어 잠을 잔다.
크림이는 조용하게 늘 내 옆에 있었다.
크림이의 포근한 체온은 심란했던 내 마음을 녹였다.
세상에 무너질 것 같다가도 크림이가 내 옆구리를 파고들면
갑자기 모든 것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크림이가 나와 함께 지낸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간다.
크림이는 우리집에 온지 1개월 만에 비만강아지가 되었다.
전에 집에서는 크림이의 식사량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간식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야 크림이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우리집에서는 먹는 것을 향한 크림이의 애타는 눈빛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얌전히 앉아만 있던 강아지가 빙그르르 돌기도 하고, 가끔 짖기도 하니
이제야 강아지다운 강아지가 되어가는가보다 싶어 간식을 꺼내줄 수 밖에 없었다.
크림이는 점점 통통해져 갔고, 그만큼 더 발랄해져 갔다.

먹을 것 앞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내가 행복해진다.
우리 크림이도 예쁜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던 옛날보다는, 행복한 뚱땡이인 지금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크림이를 먹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산책이라고는 별로 해본적 없는 크림이를 위해 부지런히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크림이가 목줄을 거부해서 목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애견운동장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다른 강아지들을 생소하게 여기고 내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뛰지를 않았다.
계단 한 칸도 오르내리지 못해 쫓아다니며 옮겨줘야 했다.
애견운동장을 찾아다닌지 10번째 정도 되니까 다른 강아지에게 관심도 보이고 계단 한 칸 오르는 것 정도 해냈던 것 같다.

여기저기 다녀보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어디 나갈 준비만 하면 크림이가 낑낑거리며 나를 쫓아다녔다.
이제는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리드줄 훈련을 시작했다.
간식도 주고, 칭찬도 하고, 어르고 달래며 집 근처에서 리드줄을 착용한 채로 걷도록 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도통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았다.
크림이는 툭하면 주저앉고, 때로는 드러눕기까지 했다.
하네스 종류도 바꾸고, 리드줄 종류도 바꿔봤다.
주저 앉으면 나도 주저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크림이를 걷도록 유인해야 했고,
그래도 걷지 않으면 크림이를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 주면 조금씩 걸었다.

몇 번이나 훈련했을까.
이제 우리 크림이는 리드줄을 꺼내 가방을 챙기면 미리 그 안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리드줄을 하고도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한다.
정말 경이로운 발전이다.
요즘에는 이틀에 한 번은 집 근처로 나가서 산책을 한다.
늘 응가하는 자리도 생겼다.
물론 크림이의 응가는 내가 잘 치운다.

강아지와 함께 하는 생활은 평생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내 몸뚱아리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나태함을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장착한 터라
내가 다른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일도 없고, 그에 도전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확고한 나의 의지와는 달리 하늘은 나에게 인연을 주었다.
내가 아는 것 이상은 절대 해보지 않으려 하는 나의 오만함을 비웃듯
인연을 만들고, 그로 인해 생각치도 못했던 일들을 마주하게 하고, 수고로움을 감내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크림이가 우리집에 오고 나서 특히 달라진 점들이 있다.


  우울증을 겪으며 나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은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깬 후였다. 잠자리에 눕기 전까지는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사노동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잠들기를 기다리는 無의 시간에는 내가 숨겨두었던 우울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 날의 일이 떠오르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리는 듯하다. 잠이 잘 오지 않고 겨우 잠들었다 해도 나는 시끄러운 꿈을 꿨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맨정신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욕설을 내뱉으며 오늘 하루가 또 시작됨을 원망하는 것이 일상었던 것 같다.

  하지만 크림이가 오고난 후부터는 나의 밤과 아침이 달라졌다.

   밤에는 크림이가 침실로 달려와 벌러덩 누워 배를 까뒤집고 재롱을 부렸다. 내 팔에 성의없게 긁힌 아토피의 흔적들을 열심히 핥아 주었다. 기브 앤 테이크가 명확했던 크림이는 조금 핥아줬다 싶으면 "이제는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손길을 기다렸다. 크림이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크림이를 쓰다듬어주면 그제야 크림이는 침실 구석 자기가 제일 좋아하고 시원한 자리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크림이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그 날의 태양이 처음 토한 금색 실금이 방 안을 비출때쯤 눈을 떠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 내가 잠시 눈을 떴다가 크림이와 눈이 마주치면 크림이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빙글빙글 돈다. 그래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 옆으로와 열심히 내 손을 핥는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내 옆구리에 찰싹 붙어서 몸을 말고 있다가 또 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예전 집에서 크림이는 새벽 6시면 밥 달라고 짖었다고 한다. 하도 컹컹 거리고 많이 짖어서 혼도 많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10시든 11시든 옆에서 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크림이가 하는 자기주장이라고는 열심히 핥는 것 밖에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크림이의 재롱과 크림이 밥주기나 응가 치우기 같은 사소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보니, 미처 내가 '억울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시원하게 모닝똥을 때리고 그르릉 거리며 뛰어다니는 크림이를 보면 웃음보가 터졌다.


  크림이를 돌보다보니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이 나의 우울을 녹였다. 이틀에 한 번 산책을 시키는 것, 빗질 하는 것, 목욕 시키는 것. 이러한 일들이 단지 내 시간을 채우기 때문은 아니었다. 크림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일들을 하다보면 세상살이 별달리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는 순진무구한 존재의 권태 없는 사랑을 받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소한 일들의 존재감이 지구를 덮을 만큼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는 거의 모든 시간을 크림이와 함께하고 있다.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갈 때도 크림이와 함께할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작년 겨울 무턱대고 크림이를 집으로 데려온 남편이 말했다.

‘크림이도, 너도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크림이를 돌본 것이 아니라

크림이가 나를 돌본 것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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